[2019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2)제주시 해안동

[2019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2)제주시 해안동
바다처럼 평온하길 염원하는 한라산 중산간마을
  • 입력 : 2019. 07.25(목) 0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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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여년의 역사 속 드넓은 초지와 목축은 중요한 발자취
4·3으로 초토화… 산업 구조적 변화 따른 개발로 사라져
학교·마을회관 중심으로 옛 풍경과 오늘날 모습 재정립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귀를 스친다. 해발 230m 고지의 공기가 주는 청량함이다. 기분 좋게 드라이브하듯 마을 안 삼거리까지 도달했는데 마을회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마을취재 경험에 비춰볼 때 그리 어렵지 않게 마을회관을 찾는 편인데 내가 상상한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돌려 다시 되돌아가다보니 마을 어르신들이 향하는 건물이 있었다. 확성기가 달린 네모난 건물이 아닌 푸른 잔디를 앞마당으로 둔 마을회관 '풍시재(風視齋)'였다. 갤러리 같은 세련된 외관에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뜨끔하게 했다.

새로 신축한 마을회관 풍시재

해안동은 마을 이름과 달리 주변에 바다가 없다. 한라산 어리목에서 시작해 평화로까지 이어지는 중산간마을이다. 게의 눈을 닮은 지형이라 '기눈, 게눈'이라고 불리다 바다처럼 평온하길 원하는 마음을 담아 해안동(海安洞)이 됐다.

풍시재 옥상에 올라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니 한라산이 가까이에 다가와 있다. 산을 병풍삼아 간간히 들어선 공동주택들도 있지만 여전히 녹지가 많다. 최근 개발바람에 이곳 역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마을 면적의 77㎢가 자연녹지인 덕분에 아직은 마을에서 자연이 느껴진다.

송씨할망을 모신 서당

600여년의 마을 역사에서 목축은 중요한 발자취다. 어승생악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초지가 있어 조선시대 국영목장 십소장 중 4소장이 해안동에 걸쳐 위치했다. 그래서 마목장과 연관된 일들을 많이 했다. 집집마다 2~3마리의 소와 말을 사육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품앗이로 서로 소와 말을 돌봐주는 소번과 우번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해방이후 4·3으로 산간마을이 초토화되고 산업의 구조적 변화로 산간 목장은 농토로 개간돼 버린다. 이후 관광산업의 확장으로 과거 목장부지들은 골프장 등의 대규모 개발사업에 편입돼 버렸다. 지금은 말 목장으로 드나들던 일부 도로와 잣성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신구 조화를 이루는 마을전경

해안동은 제주목과 대정현을 지나는 길목이기도 했다. 주르레 마을 인근에 300여년 전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고 여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주막 등을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마을 초입에 당시의 길이 남아있다.

그러나 마을을 뒤흔든 것은 4·3사건이었다. 한라산을 낀 중산간 마을이라는 이유로 마을전체가 불타고 사람들은 강제로 이주됐다. 당시 해안동 인구는 213가구에 850여명이었다. 이중 72명이 사망했다. 마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도 320여명에 불과했다. 120여가구 500여명은 마을로 돌아오지 않아 리생이 마을은 결국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만다. 곰궤는 토벌대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은신했던 곳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48년 12월 7일 발각돼 20여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여전히 물이 좋은 독승물.

그 외에도 마을 군데군데 당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해안동 1815번지 일대에는 당시 쌓았던 4·3성 일부가 남아있고 웃동산 주둔소에는 성담 일부와 망루였던 곳의 돌무더기 남아 당시를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위기를 잘 극복하고 마을을 재건해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의 해안동을 만들고 있다. 행정상으로 노형동에 편입돼 있지만 번잡하지 않은 시골스러움이 도리어 매력이 돼 고급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덕분에 해안초등학교도 학생 수가 늘었다. 한때는 숫자가 줄어 외부에 거주하는 학생들까지 실어 나르며 명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던 터이다.

300여년을 훌쩍 넘은 팽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낡은 듯 정겨운 마을 집들과 최근 새롭게 들어서는 고급 전원주택들이 씨줄날줄처럼 엮여있지만 아직은 어색하지 않다. 초등학교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나름의 질서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마을에서는 이 간극을 조절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작년에 개관한 마을회관 역시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평소 300여세대에 머물던 인구가 1000여세대로 늘어나면서 마을회관의 확장이 절실했다. 단순히 인구 증가에 의한 확장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마을회관을 통해 소통의 기회를 늘리고자 했다. 이와 함께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향토지도 만들어 배포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마을에 편입된 이주민들 역시 마을의 역사를 이해하며 다가올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길을 걷다보면 곳곳에 연자방아가 보인다. 공터나 운동장에 혹은 밭 울타리의 돌들과 섞여서 돌담이 되기도 하고 마을길에 함께 묻혀 시멘트로 포장되기도 했다. 비록 원래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쓰임새로 쓰이고 있다. 마을도 이처럼 덜컹거림 속에 서로를 맞추며 조화롭게 어우러지길 바란다.





인터뷰 / 고성룡 이장


“향토지로 만드는 소통기회”


고성룡 이장

우리 마을은 역사가 600여년이 넘는 오래된 마을이다. 주변에 물이 좋고 지대가 높아 바람이 시원하게 통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다. 어승생오름과 어승생 저수지 등이 해안동에 속한다. 과수를 재배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덕분에 한때 감귤 수출단지가 조성되기도 했었다.

마을 인구가 최근 5년 새 많이 증가했다. 이전에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오는 것과는 달리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단지가 늘어나며 급격해졌다. 고급 승용차들이 자주 드나들며 조심스럽고, 왕래가 없어 어색함도 있으나 학생 수가 늘어 학교가 안정화되고 마을이 활성화되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소통의 방법이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마을문화의 집을 통해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야 한다. 마을의 역사를 집대성한 마을 향토지를 만들어 나누었다. 우리 마을의 역사를 이해하면 조금은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르신들이 살아계실 때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마을의 역사는 사라지거나 왜곡돼 버린다. 다행히 주민참여예산을 신청해 작년에 결실을 이뤘다.

마을에는 동당과 서당이 있다. 동당은 정월 14일에, 서당은 정월 초 칠일에 제를 지낸다. 자연마을의 생성은 주변에 물이 있어야 가능하다. 해안동에는 물 좋은 곳이 많았다. 독승물처럼 관리가 돼 옛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지만 개발과정에 훼손된 곳도 있다. 그 외에도 마을 곳곳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과거 마소를 키우던 목장길과 대정현을 오갔던 큰길 그리고 4·3성 등을 볼 수 있다. 이런 유적들 또한 우리의 자산이라 생각한다. 후세들도 그 가치를 알고 소중히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향토지에 꼼꼼히 기록했다.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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