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26)끝. 식위천(食爲天)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26)끝. 식위천(食爲天)
백성이 함포고복했던 시절은… 식위천 말뿐이었나
  • 입력 : 2019. 12.05(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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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양저우에 교환교수로 나가있을 때 잘 가던 음식점이 있었는데, 상호가 바로 '식위천'이었다. 원래 이는 '사기·역생육가열전력生陸賈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한말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전세가 기울자 유방이 성고成고의 동쪽 지역을 항우에게 내주려고 했다. 그러자 모사였던 역이기력食其가 식량 창고인 오창敖倉이 있는 그곳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을 주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백성은 먹을 것(식량)을 하늘로 여깁니다(王者以民人爲天,而民人以食爲天)." 백번 옳은 말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 자체가 백성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도록 하는 것(온포溫飽) 아니겠는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임금이 아니다.

서태후 밥상

하지만 중국 역대 제왕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그리 할 수 있었을까? 백성이 함포고복했던 때가 고릿적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데, 무슨 '식위천'인가? 말만 그러하다. 음식점 이름만 그러하다. 한데 지금은 오히려 지나치게 '식'을 '천'으로 여기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중국음식에 대해 앞서 세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다시 세 가지를 덧붙인다.

넷째, 취찬聚餐과 반국飯局. 취찬이나 반국이나 모두 함께 모여 먹고 마시는 회식이나 연회의 뜻이다. 흥미로운 말은 반국이다. '국局'은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바둑이나 장기판, 또는 바둑이나 장기 한 판 승부 등의 뜻이 있다. 승부에는 판세를 살피는 것이 관건이니 형세란 말이 나오고, 판을 벌이면 꿍꿍이나 속임수가 난무하기 마련이니 계략, 올가미라는 뜻이 붙었다. 그렇다면 왜 밥에 꿍꿍이와 올가미가 붙은 것일까?



삼국지연의 속 조조와 유비
‘반국’에 담긴 올가미 의미는
속셈이 있는 연희 뜻 부각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조조와 유비가 청매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서 당시 영웅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靑梅煮酒論英雄)이 나온다.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선주전先主傳'에 조조가 유비와 술을 마시면서 천하의 영웅은 나와 그대뿐이라는 말을 흥미진진하게 각색한 내용이다. 유비는 그렇지 않아도 틈을 봐서 조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데, 영웅이라고 하다니. 유비는 놀라 젓가락을 놓치고 만다. 바로 그 때 번개가 치더니 이내 천둥이 울린다.

홍문연은 싸움인가? 회식인가?

유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 아래로 몸을 구부려 젓가락을 집는다. 조조에게는 놀란 그가 식탁 아래로 숨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이 모인 까닭은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지만, 조조는 조조대로 유비는 유비대로 서로 속셈이 달랐다. 얼마 후 관우와 장비가 등장하는데,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그들을 보고 조조가 말한다. "여기는 홍문연鴻門宴이 아니거늘 무슨 항장項莊과 항백項伯이 있겠소. 여봐라! 저 두 번쾌樊쾌에게도 술을 올려라!" 난세의 간웅이자 횡삭부시橫삭賦詩(전쟁터에서 잠시 창을 놓고 시를 짓는다는 뜻)의 문인 조조의 입에서 나온 '홍문연' 역시 먹기 위한 연회가 아니라 서로 모의를 위한 반국이었다.

음식이 하늘이라는 이름의 호텔

밥 한 번 먹자! 흔히 하는 말이다. 그곳에 어떤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송나라 문사들처럼 '반국'이란 말을 만들어가며 속셈이 있는 연회의 뜻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이 또한 중국 음식문화의 특색이 아니겠는가?

다섯째, 연년유여年年有餘와 백운봉조白雲鳳爪. 연년유여는 말 그대로 해마다 식량이며 재물이 남아돌 정도로 풍요롭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전통적인 길상吉祥, 기복祈福을 바라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와 관련된 그림에는 여지없이 잉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고기가 그려져 있기 마련이다. 이는 '여餘'와 '어魚'가 똑같이 '위'로 같은 발음에 성조까지 같기 때문이다.

뱀과 고양이로 만든 용호투

이를 일러 해성諧聲 글자라고 한다. 예를 들면 박쥐 복복은 복을 나타내는 福자와 해성인 까닭에 박쥐 또한 길상 문양으로 많이 쓰인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반닫이나 궤짝, 심지어 단추까지 박쥐 문양을 즐겨 썼다. 중국 음식점에 가보면 福자가 거꾸로 매달린 장식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는 거꾸로의 뜻인 도倒가 온다는 뜻인 到와 해성인 까닭에 '복이 왔다'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인들 물고기를 먹지 않겠는가? 하지만 물고기를 먹더라도 이를 해성에 맞춰 나름의 의미와 취미를 부여하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중국인도 물고기 요리가 나오면 위쪽을 다 먹은 다음 뒤집어서 먹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뒤집는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방향을 바꾼다(轉向)고 할 뿐. 길상이 뒤집히면 어찌 되겠는가? 행복이 불행이 되지 않겠는가?



길상 문양 등 활용 ‘박쥐 복’
용호투 등은 재료 짐작 안돼
광동인의 보양음식 탐구 열정


중국 음식은 주로 3개나 4개의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은데 음식 이름에서 재료나 조리법, 재료모양 등을 알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워낙 가짓수가 많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음식을 이름만 보고 알 수는 없다. 예컨대 백운봉조, 용호투龍虎鬪, 불도장佛跳牆은 어떤 음식일까? 복건성 복주의 전통 보양음식인 불도장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스님도 그 맛에 반해 담장을 넘을 정도로 귀한 음식이라는 뜻을 아는 이가 적지 않다.

흰 닭발로 만든 백운봉조

하지만 뱀과 고양이를 주재료로 삼은 용호투는 어떤가? 탈색한 흰 닭발로 이루어진 백운봉조는 또 어떤가? 문득 중국 음식은 이름조차 학문과 역사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예를 든 불도장의 원래 이름은 단소팔보壇燒八寶, 나중에 복락과 수명을 온전하게 갖는다는 뜻인 복수전福壽全으로 바뀌었는데, 이를 맛본 누군가가 "항아리 뚜껑을 열면 향기가 사방에 떠돌아 스님조차 향을 맡으면 참선을 포기하고 담장을 넘어온다(담啓훈香飄四린 佛聞棄禪跳墻來)"라는 시를 지은 후로 불도장이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여섯째는 약식동원藥食同源이다. 일반적으로 먹는 것이 약이 된다는 의미로 음식이 곧 약과 같으니 양자 사이에 구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흔히 약이 되는 음식의 뜻인 약선藥膳과 유사하되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다. 전설상의 임금인 신농神農이 온갖 약초를 맛보면서 비로소 백성들이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다는 그야말로 전설이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쥐 문양과 거꾸로 쓴 복자

생각건대 약도 먹을 것이니 음식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당나라 시절에 나온 '황제내경태소黃帝內經太素'는 "빈속에 먹는 것은 식물食物이고, 아픈 사람이 먹는 것은 약물이다"라고 간명하게 밝힌 바 있다.약식동원을 고려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광동인들이다. 흔히 광동음식을 두고 하늘에 비행기 빼고, 땅에 책상 빼고, 바다에 잠수함 빼고 다 먹는다는 식으로 조롱 섞인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물론 광동요리는 음식 재료 가운데 혐오감을 주는 것이 적지 않고, 야생동물을 재료로 하여 마치 동물들을 멸종위기에 처하게 한 주범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는 광동인들의 보양음식에 대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가 아닐까? 굳이 변명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스님도 좋아한다는 불도장

이제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취추바이(瞿秋白)는 1935년 5월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기 전 '불필요한 말(多餘的話)'이란 장문의 글을 썼다. 그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중국의 두부豆腐도 아주 맛있는 음식, 세계 제일이다. 영원히 안녕!" 이제 필자가 안녕을 고할 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안녕!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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