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9)화가 발굴, 천병근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9)화가 발굴, 천병근
70년대 제주생활… 야생의 색, 자연의 리듬, 향토색으로의 회귀
  • 입력 : 2020. 05.11(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종교와 예술의 조화 꿈꿔
제주와 긴 인연 맺은 작가
일요화가회 시민 미술운동

자화상, 종이에 콘테, 35x25cm, 1948

#1971년 제주일요화가회의 결성

일요화가회란 말 그대로 일요일에 모여서 그림을 그리는 시민들의 모임인데 소위 직장인이면서 화가를 꿈꾸는 아마추어 그림 동호회를 말한다. 시민들은 지치고 답답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수행자처럼 일요일에 다양한 경관과 도시 곳곳의 삶의 자리들에 시선을 맞춘다. 나날의 바쁜 일 때문에 자아를 잃어버렸던 나를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다. 한국의 일요화가회는 1965년 서울아마추어일요화가회가 발족되면서 지역의 중·소도시로 확대되면서 오늘날까지도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제주일요화가회는 1971년 서울에서 온 서양화가 천병근(千昞槿, 1928~1987)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제주일요화가회는 두 개의 모임으로 이루어졌는데 천병근이 그림지도를 맡은 제주시일요화가회와 서양화가 고영우가 지도를 맡은 서귀포일요화가회이다. 제주일요화가회는 1971년 여름, 제주시 삼성혈의 삼성사(三姓祠)에서 첫 모임을 가졌고, 같은 해 12월에 제주시 칠성통 신탁은행 지하 정다방에서 '제1회 제주일요화가회전'(12월 23~28일)을 열었다. 전시에는 초대작가와 회원들이 참여했다. 초대작가는 도외작가로 고 이중섭(유작으로 '서귀포 찬가' 출품), 이성자, 김흥수, 천경자, 박득순, 윤중식, 박생광, 한진수(천병근의 부인) 등 당시 한국의 유명작가 8명이, 도내 초대작가로 강용택, 양창보, 강광, 김택화, 김원민 등 5명, 그리고 천병근, 고영우 지도위원 2명 등의 전문작가 15명의 작품 15점이 출품됐으며, 그리고 제주일요화가회 회원들인 강대원(해녀연구가), 최현식(작가), 현충언(현, 화가) 등과 공무원, 주부, 교사, 회사원 등 모두 18명이 1인당 2~3점의 유화작품 37점을 출품했다.

삼성혈, 캔버스에 유채, 33x47.5cm, 1971

이 일요화가회라는 말은 원래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와 관계가 깊다. 당시 세관 공무원이었는데 루소는 공직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비로소 자유를 얻은 그가 파리 시내의 공원, 거리 모습, 교외를 돌아다니며 창작에 전념하였고, 루소의 작품을 눈여겨보던 남작 부인 로슈 그레이가 루소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수집하여 책을 발간한 1922년, 루소에게 '일요화가'라는 별칭을 붙여 둔 데서 그 명칭이 시작되었다. "(……) 루소가 보았고 마음에 새겨두었던 이 모든 것들을 그는 일상 세계가 끝나면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위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일요일을 그렸다." 라고 그녀는 썼다. 루소, 세잔, 피카소, 브라크와 같은 반인상주의 화가들의 등장으로 자연의 재현에 충실했던 인상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고, 서서히 입체파, 구성주의, 표현주의, 미래파, 다다이즘의 시대가 밀려오고 있었다. 새로움은 항상 혼돈 속에 있는 것이 맞다. 천병근은 파리 생활 후 더욱 다양해진 모더니즘 미술의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고, 그의 작품의 경향은 도불(渡佛) 이전과는 변한 양상을 보여 주었다.

야곡,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캔버스에 유채, 40.9x31.8cm, 1982

제주 돌담과 감귤나무, 캔버스에 유채, 32 x 41cm, 1970년대

#제주제일고 교사 끝으로 전업화가의 길

천병근은 1928년 경북 군위에서 천세광 목사와 고귀학 여사 사이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45년 17세 때 일본 도쿄 릭고(力行) 상업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일본 기독교 미술가이자 당시 도쿄 YMCA예술원 회화과 주임이었던 야마다 미노루(山田 稔)에서 사사한 후, 도쿄 소재의 미술학교 2년 과정을 수료하고 1947년 19세에 귀국하여 아버지와 함께 목표에 정착, 목포공립중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시작했다. 1978년(51세) 제주제일고등학교를 끝으로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이듬해 파리로 가서 창작에 몰입하다 1981년 3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다시 내면의 열정을 좇아 1985년(57세) 도미하여 로스엔젤레스에서 8번째 개인전을 열고 나서 더욱 강도 높게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창작 교류를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86년 여름 병으로 건강이 악화 돼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기다리던 건강이 끝내 회복되지 않아 이듬해 4월 1일 안타깝게도 향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인생은 잠시 와서 한바탕 불다가 사라진 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기억은 남겨진 작품에서 오래도록 선명하게 살아난다.

천병근은 1953년 대한미술협회(회장 고희동)에 99번째 회원이 된 후 당시 부통령이었던 독립운동가 함태영 목사의 초상화를 완성한 일 등 일생을 기독교 미술인으로서 성화(聖畵)를 함께 그렸다. 생애 동안 1954년 3월, 26세에 목포 YMCA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마지막 개인전까지 모두 8회의 작품전을 열었다. 젊어서는 앙리 마티스를 좋아하여 마티스 추모를 위해 추모글을 쓰기도 했으며, 그 추모전 리플릿 표지에 마티스 초상을 판화로 제작했다. 마티스에 대한 동경이 후일 파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제주 바다 등대, 캔버스에 유채, 31.5x41cm, 1973

#제주 인연 강광 작가 청회색과 오버랩

천병근은 1971년 경기도 강화도에 있는 강남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제주도로 발령을 받아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로 왔다. 그가 제주에 와서 맨 처음 시작한 것이 제주일요화가회의 설립이었다. 당시 43세의 혈기왕성한 화가였던 천병근은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한 교인의 의뢰를 받고 40호 크기의 '예수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고, 그 작품은 제주시 한 교회에 봉헌되었다. 그 후 제주제일고등학교, 제주중앙중학교(74~78년)에서 동시 근무를 하기 전, 1971년 서귀포 소암 현중화와 교유 중 그의 자택에서 색연필로 소암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또 청탄 김광추와도 교유 했으며, 이미 1952년 목포 교사 시절에는 당시 목포여중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제주출신 화가 양인옥과도 교류하면서 25년 동안 제주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또한 천병근이 제주미술과의 인연을 떠올릴 때 오버랩 되는 한 화가를 놓칠 수가 없다. 천병근은 1955년 27세 청년 시절, 서울 경복고등학교에서 1960년(32세)까지 만 5년을 미술교사로 지냈는데 이때 경복고 출신 제자 강광(경복고 1956~59년 졸업, 현 서양화가)이 미술반에 있었다. 경복고를 졸업한 강광은 그후 1969년 4월~1982년 2월까지 제주도 오현중·고교 미술교사와 제주대 강사로 생활하며 제주에서 10여 년을 지내면서 '들에서', '오월의 노래-잃어버린 섬', '다리가 보이는 풍경' 등 여러 명작들을 그려냈다. 강광이 제주에 있던 기간은 천병근이 제주에 있던 시기(71~78년)와 겹친다. 천병근의 어두운 청회색은 강광이 제주에서 그린 거친 청회색과 그래서인지 눈에 익다.

천병근에게 제주섬의 자연은 전혀 다른 풍토를 보여주었고 제주일요화가회를 꾸리다보니 아무래도 구상적 풍경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노을 진 한라산, 현무암 여(礖), 귤나무, 해변, 파도치는 바다, 등대, 전복 껍질, 조가비, 해산물 등 이런 주제는 그야말로 육지와 파리, 미국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키듯 제주에서의 생활은 실경을 바탕으로 하면서 강한 표현주의 작품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일요화가회가 시민미술 교육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거진 초목의 삼성사 모습을 그린 '삼성혈', 스코리아(송이) 색깔의 귤잎에 노란 열매가 제주를 상징하고 있는 '제주 돌담과 감귤 나무', 청회색 밤바다에 하얗게 일렁이는 성난 파도를 응시하는 '제주 바다 등대'. 그러나 제주를 그렸지만 파리에서 귀국 후 작품 '야곡'에선 귤과 조가비 너머 산방산과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에서의 기억을 부드러운 색채 리듬으로 표현되지만, 제주 시대의 그림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귀국 후 추상의 기하학적 요소가 더 확장되고 추상의 한국화에 집착했다. 바로 천병근의 제주 그림들은 잠시 야생의 색에 눈을 멈추고, 자연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게 한 향토색으로의 회귀이고, 다시 역설적으로 그의 내면을 한국적 미학의 본연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5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