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문명과 야만이 뒤엉키는 땅을 내달리다

[책세상] 문명과 야만이 뒤엉키는 땅을 내달리다
김훈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
  • 입력 : 2020. 06.26(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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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초(草)나라가 있다. 수많은 유목 부족을 통합하면서 나하(奈河) 북쪽의 대륙을 차지한다. 초는 사슴뿔 모양을 본뜬 글자가 있었지만, 가축이나 사람 수를 기록하는 정도였다. '탕'으로 불리는 왕들은 문자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을 금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시와 노래와 춤과 놀이와 싸움을 좋아했다.

나하 남쪽에서 바다에 이르는 대륙엔 단(旦)이 있다. 단은 문자를 알았고 문자로 세상일을 적었다. 성벽을 쌓고 무덤을 꾸미고 탑과 비석을 세우고 '캉'으로 불렀던 왕들의 모습을 그려서 사당에 모셨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 사는 단나라 사람들은 먹을 것을 쟁여놓고 죽은 자의 귀신을 모시고 밭고랑을 가지런히 했다.

김훈의 장편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은 저 아득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했다. 작가는 지하철 차창 밖 일상의 풍경 앞에서 문득 저기가 대체 어디인가, 저기는 왜 저렇게 생겼나란 의문이 들었고 그 절박함으로 상상의 세계를 쌓아올리며 시원(始原)의 지점까지 다다랐다.

소설 속 초와 단은 나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싸웠다. 문명을 등진 채 야생의 삶을 살아간 초, 문자를 숭상하며 왕궁을 지었던 단은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유목적인 초, 농경적인 단은 세계를 인식하는 바탕이 달랐다. 그들 사이에 전쟁과 일상은 구분되지 않았다. 그 안에서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울부짖으며 태어나고 죽는다.

이들 곁엔 말(馬)이 있다. 비혈마 혈통의 수말로 달릴 때 목덜미 핏줄로 피보라를 일으키는 단나라 군독 황의 전마(戰馬) 야백, 초의 왕 표가 타던 신월마 혈통의 암말로 초승달을 향해 밤새도록 달리던 토하 등 말은 저마다 두 글자의 이름을 가진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인 말은 인간의 참혹하고 허망한 전쟁을 목도했다. 야백과 토하가 인간에게 끌려다니면서도 저항하는 모습은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생명의 힘'과 닿아있다. 파람북.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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