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종의 백록담] 걷고 싶은 길, 걸어 댕기기 좋은 길

[현영종의 백록담] 걷고 싶은 길, 걸어 댕기기 좋은 길
  • 입력 : 2020. 11.09(월) 00:00
  • 현영종 기자 yjhyeo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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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1시간15분 거리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걸어서 퇴근한다. 전 구간을 걷는 것은 아니다. 도심 지역을 지나면 주로 버스를 이용한다.

20분만 더 걸으면 집인데 그 곳에만 도달하면 걷기가 싫어진다. 얼마 전 그 이유를 확인했다.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의 체험 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그 곳부터 인도가 좁아지고, 평행한 차도는 넓어진다. 거리에 늘어선 점포는 확연히 줄어든다. 걷는 재미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휴먼 스케일'이란 인간의 몸 크기를 기준으로 정한 공간·척도다.

미국과 유럽의 도시는 그 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같은 단위면적에 있는 블록 코너의 수를 비교한 결과다. 바르셀로나의 구도심은 4㎢에 블록 코너가 2025개 있다. 시카고의 1075개에 비해 갑절가량 많다. 바르셀로나를 걷는 여행자가 시카고를 걸을 때보다 교차로를 만날 가능성이 갑절 높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바르셀로나 여행자는 더 다양한 선택의 경험, 또는 다른 방향으로 뻗은 도로의 공간감을 더 체험할 수 있다. 같은 시간을 걷더라도 다양한 이벤트를 만날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걷고 싶은 거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고 볼거리가 많다. 상점이 즐비하고 쇼윈도우가 많아서 걷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서울 명동거리와 신사동 가로수길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명동거리·가로수길은 경험의 밀도에 있어 테헤란로보다 4~5배가량 높다. 명동거리와 가로수길은 골목골목이 살아있고 상점·쇼윈도우가 많은 만큼 이벤트 밀도가 높다. 특히 명동은 폭 10m의 보행자 전용 거리까지 갖추고 있다. 반면 테헤란로는 단위면적당 공간의 변화가 적어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즐비한 고층빌딩과 잘 닦인 도로만으로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힘들다는 방증이다.

서귀포시가 중앙동지역을 대상으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진행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2020년도 도시재생 뉴딜 신규사업에 선정되며 확보한 국비 등 총 199억원을 투입한다. 중앙동의 예술·체육·골목기능 활성화를 위해 혼디모영(커뮤니티센터)·생활체육센터·적정기술 창작소(공방)·마을쉼터·통합돌봄센터 등 거점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특히 골목상권을 살리기 위한 골목경제 살리기 프로그램 운영과 함께 걸어댕기기 좋은 길도 조성한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걷고 싶은 길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는 제기로 11길 일대를 '낭만이 흐르는 걷고 싶은 골목길'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울산시는 며칠 전 강동 해안길을 걷고 싶은 길로 조성하는 계획을 내놨다. 기존 산업구조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며 관광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관광 트렌드의 급변과 함께 관광시장에 지각변동이 불가피 할 것이란 우려도 한 몫을 한다. 책상머리 정책으론 한계가 자명하다. 선진지를 찾아 실태를 살피고, 지역특성·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는 맞춤형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함께 다각적인 검토·지원도 필요하다. 홍대의 걷고 싶은 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나, 최근 '굽고 싶은 거리'로 전락한 것은 모두 우연이 아니다. <현영종 부국장 겸 서귀포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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