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9·끝)현행복의 귤록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39·끝)현행복의 귤록
앞 사람 나무 심어놓으니, 뒷 사람 그 그늘에서 시원함 맛본다
  • 입력 : 2020. 12.21(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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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현실 모른 채 황금 빛나
귤 종류 집대성 역사적 의미 새겨
뿌리고 거두는 것 인과관계 있어

감귤 가라사대

2020년 겨울 아직도 노란 감귤이 돌담 너머 나무에 달려있다. 감귤의 수난시대라고나 할까. 그대로 바람과 비를 맞고 자란 감귤이라고 하여 노지감귤이 더욱 그렇다. 눈이 오기 전 나무의 감귤을 따지 못하면, 그 귤은 상품 가치가 없어진다. 농업은 참으로 힘들다. 농민들의 노력과 상관없이 유통에서 가격이 결정되니 농민의 풍년의 결실에도 시름이 깊다. 올해도 감귤 가격이 폭락했다. 매해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여전히 농민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줄 제도적 장치가 눈에 보이지 않아 농사의 피해가 고스란히 농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기를 몇 년이던가. 지금까지도 악순환되고 있고, 그럴수록 농촌은 해체돼 가고 있으며, 밭은 사라지고 토지는 팔려간다. 농민에게는 풍년이 흉년이 되고, 자신이 키운 감귤을 그냥 버리는 것까지 지켜봐야 하니, 풍년이 더 괴롭다. 해마다 농민들의 다음 농사의 목표는 요행이 희망인데 마치 도박과 같다. 감귤의 역사는 황금의 색깔이 무색하리만큼 순탄하지가 않다. 귀해서 황금이 되면 공물로 바쳐야 했고, 한때 황금나무 역할도 하며, 제주도 경제를 지탱해 주었다. 감귤의 고장이 된 지금은 감귤 처리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감귤은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모른 채 여전히 화려한 모습을 뽐내고 겨울에 빛난다.

시련 많은 겨울에도 빛나는 황금알.

한언직이라는 사람

그래도 감귤은 소중하다. 제주의 진한 과거사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감귤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책 한 권이 있다. '귤록(橘錄)', 귤의 종류와 형태, 숙성, 이용 정황, 품종의 지역성, 보관방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귤보(橘譜)'라고도 한다. '귤록'은 중국 송나라 때 간행된 책으로, 귤에 관한 체계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모두 27종의 귤이 소개되고 있다.

지은이는 남송(南宋) 시대 절강성(浙江省) 온주(溫州) 군수(郡守)를 지낸 한언직(韓彦直, 1131~?)으로, 중국 순희(淳熙) 5년(1178)에 이 책을 간행했다. 한언직의 자는 자온(子溫), 연안부(延安府) 부시현 출신으로 지금의 중국 섬서성 연안 사람이다. 소홍(紹興) 1년(1131)에 태어나 소흥 18년(1148)에 진사에 급제하여 태사령(太史令)을 지냈고 이후 광록사승(光祿寺丞), 둔전원외랑(屯田員外朗) 겸 공부시랑(工部侍郞) 등의 벼슬과 만년에 용도각(龍圖閣) 학사, 만수각(萬壽關) 관리자로 천거돼 광록대부(光祿大夫)의 벼슬을 역임했다. 한언직의 사망연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영종(寧宗) 가태(嘉泰) 연간(1201~1204)으로 추정돼 70세를 넘게 살았다. 세계적인 화학자 피에르 라즐로(Pierre Laszlo)가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언직의 아버지는 비운의 장수 악비(岳飛)와 더불어 금나라에 대항해 화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주전파(主戰波) 명장 한세충(韓世忠, 1108~1151)이다. 한언직은 아버지 한세충의 곧고 엄격한 논리를 이어받은 듯, 정직한 신하로 조정의 충신과 불충(不忠)의 신하를 구분하며 공무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했다. 특히 악비의 후손들에게 내려진 재산의 처분을 그가 직접 나서서 공정하게 조사한 후 엄격하게 조처한 것이 그것이다.

역사가는 말한다. 간신의 말을 들고 화의(和議)를 맺은 고종은 한세충이란 장군을 잘 쓰지 못했다고, 그래서 "천하가 안정되면 재상(宰相)을 주의하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수를 주의하라고. 그러나 고종은 이것을 거꾸로 했다.

한언직의 저술로는 온주군수로 재직 시 지은 '귤록' 3권, 송나라 고사를 모은 '수심경(水心鏡)' 160권을 지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다.

한언직 '귤록'의 본문.

'귤록(橘錄)'의 구성

'귤록'은 서문을 비롯하여, 상권에는 귤의 종류에 따라 맛과 모양, 키우는 방법, 생태적 특성, 저장 방법과 시문에 따른 귤의 가치, 이름의 유래 등이 서술돼 있는데, 상권에는 진감(眞柑), 생지감(生枝柑), 해홍감(海紅柑), 동정감(洞庭柑), 주감(朱柑), 금감(金柑), 목감(木柑), 첨감(舌甘柑), 등자(橙子) 등 9종이, 그리고 중권(中卷)에는 황귤(黃橘), 탑귤(탑橘), 포귤(包橘), 면귤(綿橘), 사귤(沙橘), 여지귤(荔枝橘), 연조천귤(軟條穿橘), 유귤(油橘), 녹귤(錄橘), 유귤(乳橘), 금귤(金橘), 자연귤(自然橘), 조황귤(早黃橘), 동귤(凍橘), 주란(朱欒), 향란(香欒), 향원(香圓), 구귤(枸橘)등 18종 등 모두 27종을 기록하고 있다. 하권에는 품종가꾸기, 재배 시작하기, 배양하고 나무심기, 병 제거하기, 물대기, 귤 따기, 거두어 저장하기, 제조하기, 약 쓰기 등 귤 나무에 대한 재배와 관리, 약 제조하기 등 원예와 제약에 대한 기록들이다.

역자 현행복이 편역한 '귤록(橘錄)'에는 위의 한언직의 '귤록'에다가 '송사' '한세충열전·자언직, '부록 1' 문헌기록으로 본 탐라귤보(耽羅橘譜)를 구성하여, 1. 충암(충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 2.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남명소승', 3.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 4.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5.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 6. 동리(東里) 정운경(鄭運經)의 '탐라귤보' 7.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의 '정헌영해처감록', 8. 운곡(雲谷) 이강회(李綱會)의 '탐라직방설', 9.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의 '탐라지초본', 10.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전집'에 나온 귤의 종류들을 수록했으며, '부록 2' 제주 귤 단상에서는 1.제주 귤 단상(斷想), 2.사진으로 보는 제주 재래종 귤 7종, 3.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감귤봉진'·'귤림풍악'이 수록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행복의 '귤록'은 지금까지 귤의 종류를 집대성하여 귤 품종의 역사적 연원과 계보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현행복 근영(사진 왼쪽)과 저서 '귤록'

'귤록(橘錄)'의 역자(譯者) 현행복

현행복은 한학자이자 전통문화연구자로 제주도문화사 연구의 선봉에 서 있으며, 성악을 전공한 성악가이자 무대감독, 아트디렉터이면서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서귀포시 위미리 출신으로 제주대학교 음악교육과, 영남대 음악학 석사를 마치고 20년 가까이 우도 바다굴에서 동굴음악회를 개최하여, 성악의 대중화와 제주 민요의 품격있는 전파를 위해 힘썼다. 기획자로서는 용연선상음악회, 방선문계곡음악회를 통해 자연과 선율의 아름다운 조화를 시도했다. 저서로는 '엔리코 카루사', '한국오페라에서 동굴음악회까지, 樂·觀·深', 번역서로는 '방선문', '탐라직방설', '취병담', '영해창수록', '청용만고' 등이 있다.

현행복은 오늘날의 감귤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한다. 바로 "앞 사람이 나무를 심어놓으니, 뒷사람은 그 그늘에서 시원함을 맛본다.(前人栽樹 後人乘凉)"라는 말이 그의 철학이 담긴 말이다. 누구나에게나 해당되지만 지금의 노력이 나중에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임을 감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고 거두는 것의 인과관계가 있으니 문화 계승의 과정이 아닌가.

■연재를 마치며

지구촌의 문제가 한 눈에 보이는 험로의 2020년이 어느새 저물어 가고 있다. 1년 가까이 연재를 마치며 느끼는 감회는 그래도 내일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열정이다. 한 걸음 내딛는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에 온갖 마음이 뒤섞인다. 사라져가는 제주의 환경과 옛 문화 앞에서 먕연자실해지는 대목에서는 부족한 천학(淺學)의 글솜씨로 세상을 향해 던진 어리석은 생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의 끝은 없다. 세상은 다시 올 것이고, 항상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러나 한 마디, 어느 순간 자신의 뒤를 돌아보라. 거기에 내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사실을. 오늘 작은 소리로 우문(愚問)을 던지면서 연재를 갈무리 한다. 편집진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하면서, 다시 오지 않을 2020년의 인생을 바람에 날려 보낸다. <끝>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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