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 모든 것이 나로부터 멀어진다

[좌정묵의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 모든 것이 나로부터 멀어진다
  • 입력 : 2020. 12.23(수)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제주 산간지역으로 서설이라는 첫눈이 내리며 제주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10명 안팎이던 코로나19 확진자가 20명도 넘었다. 뒤숭숭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 활동은 물론이고 일상이 위축되고 심지어 감염과 관련된 가짜뉴스까지 퍼지고 있어 도민의 삶은 불신으로 치닫고 있다. 문제는 방역을 위한 대응 자세다. 외부의 탓과 자기부정으로 지금 상황을 극복할 수가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남자 25에서 39세 여자 20에서 35세까지를 결혼 적령기라고 한다. 부모의 처지에서 이 나이를 넘기는 아들과 딸이 있다면 자식들과의 말다툼이 잦아질 것은 뻔하다. 자식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다면서 부모에게 서운함으로 마음을 닫아버리기가 쉽다. 그럼에도 부모의 나이가 70을 넘기고 있다면 자식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서도 조급한 마음으로 자식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자식들은 부모와의 거리를 점점 멀리 두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연인 관계서 이별을 대할 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으로부터 찾고자 한다. 그러면서 분노하고 원망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가트리고 이지러지게 한다. 이런 원인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인식하기는 쉽지가 않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으로 인한 결과임을 받아들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자신으로부터 그 문제의 발단을 찾지 못한다면, 왜곡된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끝내 후회의 삶을 남기고야 만다.

최근 우리 사회의 단면을 국회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현안의 심각한 문제를 직면하고도 '나'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그리고 현안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을 통한 본질의 왜곡 등을 보면서 정치에 대해 '한정된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과정'이라는 데이비드 이스턴의 정의에 대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정치의 개념에 대해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해결하려는 자세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멀어지는 이유는 상대에게 있지 않다. 가까워지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확집의 '나'는 없어야 한다. 무한히 자유로워야 한다. 불가의 반야경에서 강조한 '무아(無我)'란 허무한 인식이 아니다. 깨끗하고 비어있는 그릇의 상태로 비유를 하면 적절할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에서 마음이 가난한 상태와 짝이 되지 않을까. 자신에 대해 부족하고 초라하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여기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려는 마음의 다짐이기도 하다.

겨울은 참 따뜻하다고 했던 이의 말이 오늘은 왜 이렇게 그리움으로 떠오르는지. 언제나 이 때가 되면 여기저기로부터 미담을 접하게 된다. 코로나19 감염자 치료를 담당했던 간호사가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동안 홀로 격리 생활을 하면서 환자들을 보살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단지 직업의식이란 기준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경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다. 오늘, 문둥이를 어루만졌던 예수의 손에서 맹목을 보는 게 아니라 무아를 느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83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