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업은 비워내고 또 비워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다. 두 가지 색조만으로 자연 공간을 묘사했던 그는 그마저 걷어냈다. 그 끝에 색의 부재가 '존재'한다. 누군가는 종이에 스민 어떤 색을 말하겠지만 그건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다. 마음을 닦는 수행자처럼 색과 형상이 잠시 머물던 화면을 깎아내고 지워내는 동안 저절로 얻어졌을 뿐이다. 은분을 한국화 작업의 재료로 '발견'해 화면 위에 삶의 풍경을 비추고 있는 조기섭 작가다.
한라일보 1층 갤러리 이디(ED) 9인 초대전에 나온 그의 작품은 변화하고 있는 작업 여정을 살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장지에 분채와 은분을 이용한 '누구의 소망'(2014), '공명의 시간-간극'(2016)을 지나 장지에 은분을 쓴 '혼'(2021)에 이르면 색을 뺀 화면과 마주하게 된다.
비우면 비로소 채워진다고 했던가. 한동안 여러 색을 사용해 세필로 구도하듯 쌓아올리는 붓질에 몰두했던 작가는 그런 작업이 당장엔 시각적 화려함을 주지만 사유의 확장엔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그림 속에 차츰 색을 줄여갔고 2017년부터는 은분을 주재료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은사와 황망한 이별을 겪은 뒤 그려진 촛불 이미지의 '혼'처럼 그의 작업은 적어도 다섯 차례 그리고 지우기를 거듭한다. '지운다'보다는 '갈아낸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표면을 벗기는 기계를 조심스럽게 다루며 앞선 흔적들을 없앤다.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그 가운데 살아남은 자국을 정리하면서 형태를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고행' 끝에 완성된 그의 작품은 쉬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교에 개어 칠한 은분을 다듬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면은 관람자의 각도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 안에 빛이 담기고, 사연이 흐른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린 자꾸만 서성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