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대전에서 제주도민 300명 이렇게 죽었다"

[현장] "대전에서 제주도민 300명 이렇게 죽었다"
4·3수형인 300명 학살된 대전 골령골 현장
길이만 1.3㎞ 달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한국전쟁 터지자 최대 7000명 무차별 학살
학살 군인에겐 '혁혁한 전공' 세웠다고 추앙
  • 입력 : 2021. 12.18(토) 12:02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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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트 미군 소령이 찍은 대전 골령골 학살 모습. 무릎을 꿇린 채 뒤통수에 총을 겨눈 것을 보면 1950년 7월 초중순 벌어진 학살로 추정된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골령골에서 희생된 제주4·3 수형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희생됐기 때문에 사진 속 인물이 제주도민일 수도 있다.

제주도민 300명이 몰살 당한 현장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제주4·3을 비롯해 여·순, 보도연맹 관련 등으로 최대 7000명이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 골령골 얘기다.

 17일 대전 낭월동 골령골 학살터는 풀 한 포기 없이 황무지처럼 휑했다. 한 켠에 세워진 비석과 가건물로 된 추모시설 만이 이 곳을 최소 4000명, 최대 7000명이 학살된 곳임을 증명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족들은 이 곳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부른다.

 유족들의 말대로 학살지 규모는 상당했다. 올해 발굴이 마무리된 제1학살지(100m)에서만 100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는데, 총 8곳의 학살지를 모두 이으면 길이가 1.3㎞에 달했기 때문이다. 최대 7000명이 학살 당했다는 추정이 과한 것 같지 않았다.

 골령골에서의 학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이뤄졌다. 이승만 정부가 좌익 활동 전력(대전형무소 수감자·보도연맹 가입자 등)이 있는 이들이 북한군에 합류할 것을 우려, 군·경을 동원해 '예방적 학살'에 나선 것이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 제2차 군법회의(1949년 7월 2일~4일)를 통해 징역 7년을 선고 받은 도민 300명이 수감돼 있었다.

 

학살 이후 군경이 시신을 확인하는 모습

학살 방식도 시간이 지날 수록 잔인해졌다. 처음에는 기둥에 묶어 7m의 거리를 두고 사격을 했지만, 전황이 급박해지자 구덩이 쪽으로 무릎 꿇리게 한 뒤 그대로 뒤통수에 총격을 가한 것이다. 제주 출신 수형인은 뒤통수에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 1950년 7월 3일부터 5일 사이에 희생됐다.

 학살 직후인 1950년 9월 현장을 둘러본 영국 '데일리워커'의 앨런 워닝턴 기자는 "나치 살인수용소에 관한 글을 읽으며 그 곳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골령골을 보고) 그 때의 내 상상이 어처구니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증언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골령골 학살 주체를 당시 계엄사령부와 헌병대, CIC, 경찰, 형무관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당시 헌병으로 복무했던 김모씨는 "헌병사령관 송요찬이 와서 '이거 다 죽여야 한다'고 했어요. 송 사령관이 직접 진두해가지고… 내 장소도 잊지 않아"라고 하며 골령골의 기억을 꺼냈다.

 반면 '한국헌병사'에는 "송요찬 헌병사령관이 항상 진두에 서서 부하 헌병을 질타해 임무 수행에 만전을 기했고, 특히 평택, 대전 등지에서의 작전에서 과감 민활한 분투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상반된 내용으로 기술돼 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는 골령골 학살터에서 '대전형무소 4·3수형인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거행했다. 송은범기자

이날 학살터에서 '대전형무소 4·3수형인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거행한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는 "4·3특별법 개정으로 자손들에게 보상금을 준다고는 하지만, 영령들의 희생 사실을 밝혀주는 일이 우선"이라며 "앞으로 영령들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하고, 이곳까지 끌려와 죽음에 이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골령골 학살터는 2024년까지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이 들어 설 예정이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는 골령골 학살터에서 '대전형무소 4·3수형인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거행한 뒤 음복을 하는 모습. 최대 7000명이 학살됐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추모시설이 없이 휑한 풍경이 보인다. 송은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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