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수의 문화광장] 나를 바라보는 탈동일시

[박태수의 문화광장] 나를 바라보는 탈동일시
  • 입력 : 2021. 12.21(화)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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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보여 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보는 자가 아니다. 내 몸은 피곤하거나 흥분하기도 하고, 아프거나 건강하기도 하고, 무겁거나 가볍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내면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캔 윌버는 이렇게 내가 아닌 나를 직관하는 선언을 했다.

이 선언문은 무엇을 전달하려고 할까? 우리는 살면서 몸이 아프면 '나 아파'라면서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마음이 아프다거나 슬프다고 하면서 '내가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보이는 몸이나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며 '참나'가 아프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참나'가 아닌 것에 매달려 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켄 윌버는 단호하게 말한다. "불안의 궁극적 해소는 내가 아닌 그 불안으로부터의 탈동일시"라고. 불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바라볼 때 불안이 있든 없든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삶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이나 생각, 기억은 모두 자신이 배타적으로 동일시해왔던 것에 불과하다. 나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으로 여김으로써 나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들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진정한 보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처럼 배타적 동일시를 하면서도 그것들이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동일시함으로써 나를 속박하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의 괴로움을 점점 더 강화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의 괴로움을 관찰하거나 주시할 뿐이다. 어떤 고통을 주시한다는 것은 이미 그 상태를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순수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싸우는 대신 그 괴로움을 끈기 있게 바라봄으로써 그 괴로움이 '나'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필자가 겪는 괴로움의 하나는 재정적 어려움이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 일어나는 걱정이다. 이 때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기울어짐을 보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단지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괴로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괴로움이 아니다. 나는 괴로움을 보고 느낄 수 있지만 보여 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보는 자가 아니다..."라며 조용히 음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괴로워하던 나는 편안해 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 <박태수 제주국제명상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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