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허수경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도 먹고
드러눕고
삽화=써머
-------------------------------------------------------
시는 이만큼 왔다. 스스로 내 허리를 낫으로 찍어 내가 바르게 갈 수 있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이만큼, 이만큼 시를 쓸 수 있다. 내 허리를 사랑했던 연인들이여, 나의 눈부신 독자들이여. 한눈을 팔지 않도록 내 허리를 찍어다오. 언제나 몸이 아프도록. 비린 생피를 흘리며 거짓과 위선과 부정을 뿌리칠 수 있게, 세간의 사랑과 가난과 허무를 견딜 수 있도록. 시여 내 허리를 찍어다오. 아무 사연 없이 시가 올 수 없으니, 내가 없어지고 시인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찍으며 가야 할지. 시인의 피여, 목청껏 목청을 다한다. 과연 언제쯤 시에 대해 널널해질 수 있을까, 묻던 허수경은 5년 전 54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해 독일 뮌스터에 외롭게 묻혔다. 허리를 찍힐 때 나는 비명소리가 시란 듯, 그 피가 시의 꽃이란 듯 시를 쓰며 그 시들로 밥상을 차리며, 또 생활의 밥상을 챙기며 살다 갔다. 대체로 한 시인이 쓴 시 속엔 한 시인만 살다 간다. 서럽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