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실록에 제주 ‘승첩’ 기록 있지만 현대적 조명 작업 미미80년대 논문에도 "을묘왜변과 제주 학문의 사각지대" 지적최근 논문 발표 잇따라 눈길… “최종 결과 제주대첩 주목을”
[한라일보]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판에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검색하면 이런 '정의'가 뜬다.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전라남도 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한 사건.' 이칭은 '달량왜변'으로 소개됐다. 거기엔 '제주'가 없다. 뒤이은 '역사적 배경'을 읽어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실록에 1555년 을묘년에 전라도 일대에서 퇴각하던 왜구가 제주 앞바다로 집결해 전투가 벌어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라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속 '을묘왜변'에는 제주가 빠져 있다. 그래서 묻는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왜 잊힌 역사가 되었나.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해 큰 승첩 거둬"=명종실록 명종 10년 7월 6일 기사는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장계(狀啓)하였다"로 시작된다.
2000년 12월에 제주시 원도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오현교에 세워진 '을묘왜변 전적지' 표석. 당시 제주시와 한라일보사유적지표석세우기추진위원회 명의로 설치했다. 이상국기자
"6월 27일, 무려 1000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를 쓴 한 왜장(倭將)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튿날 명종실록 기사에는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하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왜적이 변경을 침범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멀리 떨어진 외로운 섬에 병력이 미약하고 원병(援兵)도 때맞추어 이르지 못하므로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심히 염려하여 잠자리조차 편치 못한 지가 여러 날 되었다"며 "평소 경의 충의(忠義)와 목숨을 나라에 바쳐 북채를 쥐고 죽으려는 정신이 아니었다면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하여 이와 같은 큰 승첩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라고 치하했다는 것이다.
제주대첩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1601년 7월 발생한 길운절 등의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던 김상헌의 '남사록',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1704년 이형상의 '남환박물', 1765년 윤시동의 '증보탐라지' 등으로 주로 김수문 목사의 활약에 초점을 맞춰 을묘년의 사건을 적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 지방사 연구의 태두'로 불리는 심재 김석익이 한문으로 쓴 '탐라기년'에 제주대첩이 기술된다. '탐라기년'은 을묘년이던 1915년 완성했고 3년 후에 간행된 것으로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제주의 역사를 편년체 통사로 서술했다. 이 중 '탐라기년' 권2에 "을묘(1555) 명종 10년 6월, 왜적이 침입하니 김수문 등이 이를 쳐부쉈다"며 왜적이 화북포로 침범했다는 점을 짚었다. 여기에서 김석익은 훗날 김상헌이 말했다는 대목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왜인 중에 앞뒤로 들어와 노략질함에 한 사람도 뜻을 얻지 못한 것은, 섬을 둘러 석벽이 바다 속에 쭉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늘이 만든 요해처(要害處)이니 제주의 보배이다. 이로부터 이후 봉홧불에 놀라지 않았으니, 거주하는 백성들이 편안히 잠자리에 들며 근심이 없기가 대개 지금까지 40년이 된다."('역주 탐라기년', 제주문화원, 2015) 김석익은 '탐라기년'만이 아니라 1920년대 '탐라인물고'에서 제주대첩 관련 인물인 김성조를 다뤘다. 심재가 서문을 쓴 담수계의 '증보탐라지'(1954)에도 제주대첩과 그에 얽힌 인물 이야기가 실렸다.
▶정부군 도움 없이 제주인 자력으로 일군 대첩 연구=제주사람들이 함께해 일당백으로 싸워 크게 이긴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아쉽게도 해가 지날수록 그 의미를 새기려는 움직임이 줄었다. 그 후로 이어진 수난과 침탈의 역사가 주는 무게 때문인지 제주 섬의 승전사는 도심에 놓인 푯돌 등으로 간신히 기억됐다.
김병하는 '을묘왜변고'('탐라문화', 1989)를 통해 "이 왜변은 왜구의 성격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다. 즉 종래의 소규모 왜구와는 규모와 전쟁의 양상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대일무역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면서 "그런데 이 분야는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연구된 업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을묘왜변은 5월의 달량왜변과 제주왜변으로 양분되는데 특히 후자의 연구는 학문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고 당시 학계의 현실을 지적했다.
2000년대 이후 을묘왜변을 다룬 학술 논문 중 하나는 윤성익의 ''후기왜구'로서의 을묘왜변'('한일관계사연구', 2006)이다. 윤성익은 이 글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난 16세기 중반 동아시아 해역에서는 다수의 중국인과 일본인 등이 연계된 후기왜구가 활동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성익은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이 펴낸 '을묘왜변과 제주대첩'(2022)에서도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의 왜구' 집필을 맡아 조선전기의 왜구·왜변과 그 대응책 등을 담았다.
지난해에는 한라일보에 게재된 전문가 연재 '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을묘왜변 현장을 가다'에 이어 제주연구원 학술세미나가 개최되면서 제주대첩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 시기에 학술 논문 발표도 잇따랐다.
명종실록에 기록된 16세기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기록 중 일부. 조선왕조실록 인터넷판.
김기둥은 '을묘왜변 전후 제주도(濟州島)의 방어태세'('역사와 실학', 2022)에서 "임진왜란 전 조선이 겪었던 최대 규모의 왜군 침입인 을묘왜변을 전후한 제주도의 방어태세와 왜변의 마지막 전투인 제주성전투"를 들여다봤다. 정현창·김병인은 '을묘왜변의 제주성전투 연구: 사찬자료를 중심으로'('지방사와 지방문화', 2022)에서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제주성전투에 대한 기록은 소략한 까닭에 그 전개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며 '탐라기년'을 통해 왜구의 제주 침입 경로가 화북포일 가능성을 입증하는 등 정부군의 도움 없이 제주인 자력으로 대첩을 거둔 제주성전투의 의의를 살폈다.
가장 최근의 연구 논문은 홍기표의 '을묘왜변 제주 대첩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의'('제주도연구', 2023)로 제주대첩 관련 옛 사료를 일일이 확인하며 "왜구와 제주 민군 사이 제주성을 사이에 둔 대규모 공방전에서 대첩을 거둔 사실" 등에 중점을 두고 재조명했다. 홍기표는 특히 "을묘왜변은 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노략질 사건으로만 해설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개정 증보 과정에 "제주성 전투와 제주 대첩이라는 최종 결과가 해설에 반드시 추가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