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41)애월읍 하가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41)애월읍 하가리
조상 대대로 인재의 요람임을 자부해온 마을
  • 입력 : 2023. 06.30(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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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고내봉 동쪽, 섬 제주에서 가장 큰 연못이 있다. 3000평에 달하는 너른 연못을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수 백년 된 아름드리 고목 수십 그루가 곳곳에 유서 깊은 마을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초가집들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마을. 하가리라고 하는 마을 명칭의 연원이 참으로 특이하다. 제주어 고유지명인 더럭이라는 용어를 한문으로 음차와 훈차하여 '더'를 '加'로 '럭'을 '樂'으로 표기하여 원 지배 시기 탐라총관부 현촌의 위상을 가졌던 고내현의 내륙 지대를 고작 명의 제후국 조선 태종 때(1418년) 분리하여 하나의 마을로 정하면서 가락리(加樂里)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규모와 위상이 큰 이 마을 윗동네를 상가락, 알동네를 하가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하가락이 정조 22년(1798년)에 하가리로 바뀌었다.

장봉길 이장

필자가 이 역사자료에서 감동하게 된 것은 가락(加樂)이 지닌 의미가 21세기에 들어서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좋아지는' 마을. 후손들을 위하여 선조들이 지은 마을 명칭 속에 담긴 염원이 오늘날, 제주의 리 단위에서 사회간접자본이 도시지역에 못지 않는 기반을 구축하여 도농복합지역의 튼튼한 위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애월읍 관내에서 유일하게 하가리 116세대에 LPG 배관망이 구축되어 도시기능을 보유한 농촌이며, 다세대 주택들이 농촌경관과 함께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여건이 마련될 수 있도록 불굴의 의지로 노력해온 결과다.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마을 곳곳을 이르는 고유지명들이 참으로 정겨운 제주어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우당빌레, 득근이왓, 주승굴, 무르세기, 돔박생이, 사리왓, 잣질 등 조상 대대로 삶을 영위하며 지칭하던 공간 명칭들이다. 토양이 좋아서 소출량이 여타 마을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마을 어르신들이 일러주시는 바에 의하면 보리농사를 주로 하던 시기에는 북제주 1등 토지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고 한다. 탐라국 시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마을의 역사성 뒤에는 농업생산성이라고 하는 경제적 배경이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농업 여건은 선비들을 키워낼 수 있는 뒷받침이 될 수 있었을 터. 마을공동체 정신에 기반을 둔 학문숭상의 문화가 뿌리 깊게 내려진 마을이다.

장봉길 이장은 하가리의 가장 큰 자긍심으로 당연하게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마을공동체의 사명감"이라고 밝혔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일러주는 사연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출향인사들의 학창시절 모습이 보인다. 제주시나 육지, 또는 해외에 유학을 간 자녀를 위하여 학비를 보내는 일이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학자금을 보내기 위하여 밭을 파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 한 마리 가격이 밭 1500평 정도였던 시절, 밭을 몇 개 팔아서라도 대학교육을 시키려 했던 그 마음들이 있었기에 아들, 딸들이 세상에 공헌하는 힘이 되었음을 강조하신다.

재산보다 사람의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던 가치판단의 터전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한 문화가 깊게 느껴지는 미담이 있다. 1953년도 더럭국민학교 학교대장에는 학교 부지 1948평을 단기4279년(1946년)에 장경학 외 1인으로부터 기부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학교로 유명한 더럭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을 흔쾌하게 내놓을 수 있었던 고마움과 교육의 중요성을 마을의 역사 속에서 일궈온 소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가리의 중요한 장점은 교통이 편하다는 것이다. 마을 위 아래로 동서로 뻗은 중도로가 지나고 있으니 자동차문화 시대에 농업경관 속 다세대 주택에 살며 직장생활 및 자녀교육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이 마련된 마을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자연 속에서 사람의 가치를 키워왔고 키워나가는 마을. 아름다운 마을 돌담들이 그 정성스러운 '사람의 길'을 이어가게 한다. <시각예술가>



팽나무 그늘쉼터와 주변풍경
<수채화 79㎝×35㎝>

초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령이 오래된 길가에 팽나무와 그 아래 나무데크시설로 쉼터를 만든 모습을 그렸다. 담백한 느낌을 더욱 살리기 위하여 담채로 그리니 스케치한 연필 선들이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하고, 광선의 강도와 양을 설명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팽나무 그림자라고 하는 화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면적에서 우러난다. 단순하게 빛과 그림자의 대비라고 지칭할 수 있으나 거기에는 파르테논신전 기둥 굵기의 팽나무의 존재감에서 모두 파생된 것이다. 돌담이 가진 독특한 멜로디가 과거와 현재를 미래로 이끄는 듯 하고. 단순화 된 건물 지붕의 모습과 벽면 창과 문들의 농촌 이미지는 소박한 풍요를 이야기 한다. 격조 높은 삶의 공간 옆을 지나가는 여름 길목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쉼터를 제공하듯, 삭막한 현실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하가리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이 풍경을 선택했다. 승부는 팽나무 그늘의 공간감에서 갈린다. 사진으로는 추구할 수 없는 본질적인 느낌을 수채화라고 하는 아주 예민한 채색 방법을 통하여 구체화 했다.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자세와 같은 해결방법이 아니고서는 저 미세한 그림자 속 광선을 구현할 수 없다. 어두운 그림자 부분이지만 워낙 강렬한 태양광선이 쏟아지는 상황이라 사방에서 날아오는 반사광들을 품어야 한다. 여름날에 시원함을 찾는 방법 또한 마음먹기에 달렸으므로 광선의 양이 원근법을 더욱 강조하고.



대문 있는 초가, 문귀인 가옥
<수채화 79㎝×35㎝>

마을에 초가가 대부분이던 시절 하가리의 풍경은 다른 마을들과 다른 독특한 것이 있었다. 뼈대있는 집안이라고 일컬어지는 집은 대부분 정낭이 아니라 이런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삼무의 섬으로 알려진 제주에는 대문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어찌하여 하가리에는 대문이 많았다는 것인가?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을 종합하면 글공부를 많이 한 선비집안에서 입신양명하여 관직을 한 집안이기에 양반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을 만들어 자존심의 표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 기반을 둔 역사를 그리려 하였다. 하가리에 있는 다섯채 중 한 곳. 구도는 파격적이다. 면 분할을 한 것과 같은 대비효과를 통하여 세상은 부분과 부분들의 결합이라는 느낌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흙과 돌, 나무 이 세 요소만 가지고도 주거공간을 만들어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 부족함이 없던 시절, 그 3요소가 극명하게 만나는 지점을 화면의 중심에 두고서 대문이 있는 통로 사이로 멀리 보이는 땔감 쌓인 모습과 늘 음지에 위치한 이끼가 얇게 낀 돌담 위에 멀리서 안그래(안채)가 존재감을 나타낸다. 물상을 만난 광선들이 독특한 구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품앗이를 하는 형국이다. 질감 표현을 중점적으로 할 필요성이 절실한 그림인 이유는 오래된 느낌을 얻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당에 깔린 잔디가 눈부신 햇살을 받아 연두색으로 찬연하게 다가온다. 공간감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이 보유한 오랜 시간성은 문화재 건물 이상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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