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출향해녀/ 기억의 기록] (5)제주 해녀 삶 이야기

[독도 출향해녀/ 기억의 기록] (5)제주 해녀 삶 이야기
"한국 천지에 제주 해녀 안 닿은 곳 없어… 기억 또렷"
  • 입력 : 2023. 07.19(수) 00:00  수정 : 2023. 07. 19(수) 16:00
  • 이태윤·강다혜 기자 lty9456@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장영미 해녀 "울릉도 물질 11년, 생계 위해 바다 건너 출향 물질"
김옥자 해녀 "독도 물질 기억 선명… '물골'·'갈매기알' 기억도"




[한라일보] 독도 땅을 밟은 제주해녀의 이야기는 이미 독도의 유인화, 독도 수호, 제주의 강인한 여성상이라는 데까지 의미가 확장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생계를 위해 원정 물질을 떠났던 해녀 한 분 한 분의 삶의 이야기다. 생계를 위한 원정 물질이라는 의미에 더해 여성 노동자로서, 거친 파도를 타고 척박한 섬까지 다다랐던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열여덟부터 11년 울릉도 물질… 한국 천지에 제주 해녀 닿지 않은 곳 없어"

"열여덟에 여기 울릉도에 와서 물질을 시작했고, 스물아홉에 나왔으니 울릉도 물질만 11년을 했지. 그때 집에서(제주에서) 오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여기서 그냥 살았을 거라"

지난 5월 울릉도를 찾은 해녀 일행들이 계획에 따라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한 이른 아침, 장영미 해녀는 울릉도 도동 소재 천주교 성당 묘지로 향했다. 그는 벌써 약 4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울릉도 물질 당시의 기억을 생생히 묘사했다. 성당 묘지로 향하는 길은 꽤나 가파르고 험했는데, 가는 길 내내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천주교 성당 묘지엔 그의 언니를 모시고 있다.

울릉도 풍경. 오하준 촬영 전문가.

장영미 해녀는 "우리 10남매 중에 내가 7번째야. 기호 1번 언니가 가장 먼저 여기(울릉도)에 왔고, 다섯 번째 언니가 왔고, 내가 왔지"라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육지는 관광객도 많이 생기고 변한 곳도 있는데, 바당(바다) 속은 지금 들어가도 어느 고망(구멍)에 뭐가 있는 지 속속 다 알아져(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울릉도에서 물질하며 체감했던 바닷속 풍경과 그곳에 함께 거주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울릉도는 밀물 썰물이 적었어. 우리 앞 사람들(선배 해녀들)이 다니기가 험했지. 울릉도에 눈이 엄청 많이 오거든. 우리는 고무옷(고무로 된 해녀복)을 입고 물질을 해서 그나마 춥지 않았어"라며 "울릉도는 오징어가 많이 나서 옛날부터 '돈 섬'이라 불렸어. 그래서 제주 해녀들이 울릉도로 많이 모였는데, 그때 당시 울릉도 사람들이 제주도 여자들을 보면 쌀쌀맞게 대해서 서러울 때도 많았지. 제주도에서 못 먹고 못 살아서 여기로 돈 벌러 왔다고 여겼으니까"라고 기억했다.

고향 제주를 떠나 울릉도까지 바다 건너 오게 된 사연도 읊었다. 장 씨는 "어머니 아버지가 워낙 못 살았기 때문에, 쌀 받아 먹을 돈도 없었어. 언니하고 나하고 물질해서 공동으로 벌었지. 제주도에서 그 정도로 힘들었어. 우리(해녀) 돈이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됐을 거야"라고 사연을 설명했다.

독도 물질에 대한 기억도 들을 수 있었다. 장영미 해녀의 설명에 따르면, 1955년 생인 그보다 한 세대 위 선배 해녀들이 주로 1960년대, 길게는 1970년대까지 집단을 이뤄 독도 물질에 자주 나섰다. 장영미 해녀는 "우리는 '남발이'라는 걸 타고 이동했어. 배에서 잠 자고, 밥 먹고, 이틀가량 독도에서 물질하고 나오기를 반복했어. 독도에 갈 때 경비정이 한 척 따라 갔어"라고 설명했다. 또 "우리보다는 우리 첫째 언니와 선배 해녀들이 독도 물질을 자주 갔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천지에 제주 해녀가 물질하지 않은 곳이 없어. 가족 먹여 살리려면 뭔들 못 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장영미 해녀가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소재 성당 묘지를 찾은 모습. 오하준 촬영 전문가.

김옥자 해녀는 독도에서의 물질 경험을 들려줬다. 그의 이야기에서 독도 바다와 풍경, 제주에서의 해녀 모집 과정까지 독도 출항 물질에 관한 여러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열세 살 적부터 해수욕장에서 처음 물질을 배우고 시작했다. 이후 19세가 되면서 제주를 떠나 본격 출항 물질을 다녔고, 스물다섯이 되던 해 처음 독도 물질에 나섰다고 말했다.

김옥자 해녀는 "당시 선주가 해녀들을 모집해서 알음알음 모여 단체로 독도와 울릉도 물질에 나갔어. 반장이라는 사람이 모집했었는데, 처음엔 10명 정도 인원이 갔었지. 협재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개인이 모집해서 울릉도, 독도는 많이 갔어. 독도는 한 번 가면 한 두어달 쯤 있었어"라고 말했다.

독도 물질 당시 하루 일과를 묻는 질문에 그는 "하루 일과? 해녀가 물질하지 뭐. 보통 아침 8시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와. 아침 밥 먹고 옷 갈아입고, 독도에서 배 타서 미역 캐고. 독도는 미역이 정말 많았어"라며 "우린 고무옷이 생기기 전에부터 물질을 했었는데, 독도는 나무도 없어서 추웠어. 오리발도 지금 같은 오리발이 아니라 절반짜리 오리발(을 차고 물질을 했다)"이라고 설명했다.

'물골', '갈매기 알' 등 독도 해녀 물질의 상징과도 같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여러 논문과 기록에 따르면, 독도 물질에 나선 제주 해녀들은 독도 서도의 '물골'에서 몇 달씩 머무르며 물질을 했다. 물골은 독도에서 유일하게 물이 솟아오르는 독도 서도의 천연 동굴이다. 독도에는 전복, 소라 등 다양한 해산물이 있었지만 해녀들은 주로 미역을 채취했다.

해녀들은 물골 자갈밭에 가마니 몇 장을 깔고 자거나 단체로 50여 명이 갔을 때 물골에 나무를 이용하여 2층으로 단을 만들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옥자 해녀는 "갈매기 알은 먹기도 했지만, 갈매기 알로는 머리를 주로 감았어. 물골에서도 물은 나오는데 물이 많이 짜. 갈매기 알을 삶아 먹으면 기름이 조금씩 나와서 좋았지"라고 경험을 들려줬다. 그러면서 "그때는 푸대(큰 자루)도 없고, 스티로폼도 없으니, 물굴에 요(이불) 넓이만 한 걸 하나 깔아서 둘이서 잤어. 밥 하는 사람은 지하에 박스 깔고 자기도 하고, 눅눅해도 그냥 잤지"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때는 미역이 돈이 됐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일이 끝나면 상군 해녀 기준 17만원에서 20만원을 받았어. 당시 돈으로는 아주 큰 돈이야"라며 "우리는 배에다 화물로 작업한 것들을 실어서 강원도 속초로 실어 날랐어. 속초까지 4시간 걸렸고, 속초에서 건조하고"라고 기억했다.

김 해녀는 "독도 바당은 제주만큼 막 거셌던 거 같진 않아. 독도 바당이든 울릉도 바당이든 지금도 들어갈 수 있지. 이 정도 파도는 센 것도 아니라"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태윤 정치부차장·강다혜기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42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