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식민지시대를 보는 눈=제주 역사는 항상 열려 있었다. 선사시대와 탐라 개벽 이래 바다는 열린 공간이었다. 북방 계통의 삼을라가 탐라를 세웠고, 벽랑국의 세 공주가 농경과 목축문화를 안고 섬에 들어왔다. 탐라는 5~10세기에 걸쳐 백제·고구려·신라 등 한반도의 고대국가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일본과 조공외교 및 활발한 해상교역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여 나갔다.
1105년 탐라 멸망 이래 탐라민들은 새로운 상황에 대응해 활로를 개척해 나갔다. 고려왕조와 몽골제국에 타협하며 존속해 나갔지만, 때로는 탐라 부흥을 내건 '반란'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탐라 흔적 말살에 이어 유배 죄인을 가두고 말 기르는 섬으로 고립된 변방 제주민들은 자유와 해방을 찾아 육지로 탈출을 감행했다. 결국 1629년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고 200년 간 제주는 폐쇄적인 뇌옥(牢獄)의 섬이 되었다. 동아시아 바다를 자유롭게 다니며 이선위가(以船爲家)하던 제주 해민의 기질은 숨어들어 버렸다.
1876년 개항 이후에야 제주 사람들은 자유롭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890년대부터 제주민들은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자각했다. 19세기 말 이후 지식인들은 근대 학교 유학을 위해, 해녀들은 출가물질을 위해, 청년들은 노동을 위해 육지로 나아갔다. 침탈과 저항의 역사로 점철된 일제강점기에도 수많은 제주민들이 일본 오사카의 공장을 찾아 제주바다를 건넜다. 잠녀들은 무리를 지어 남해, 동해, 일본 연안 등으로 출가 잠수 노동에 나섰다. 이제 제주사람들은 제주도 안에 갇혀 살지 않고 밖에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식민지시대는 이율배반적인 안목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일제 강점의 억압적 상황 속에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민족교육과 야학이 유행했고, 역동적인 항일운동이 펼쳐졌다. 침략적 자본주의의 직접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선시대에는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제주도 밖으로의 활발한 진출이 이루어졌다. 수백 년간 섬 안에 갇혀있던 제주민들에게 식민지시대는 억압과 착취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한반도와의 단선적인 관계에 얽매여 있던 굴레를 벗어나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자주 운항의 상징 복목환 (일본 삿포르시 중앙도서관 소장)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개항 이후 맨 먼저 제주섬을 박차고 나간 집단은 해녀들이었다. 해녀들은 이미 1890년대 이래 부산 영도로 출가 물질에 나섰다. 부산은 출가 해녀와 제주사람들의 터전이 되었다. 1915년 4월 제주도-부산 항로가 개설되면서 부산-시모노세키[下關] 경유로 일본으로 건너가는 게 쉬워졌다. 해녀들의 도일(渡日)뿐만 아니라 청년 노동자들의 일본행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결국 1923년 2월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 자본가들이 세운 제우사(濟友社)가 직항선을 처음으로 띄웠다. 이어서 3월 아마사키기선의 군대환이 제주-오사카 항로에 등장했다. 이때로부터 제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제주민들은 경제 활로를 찾아서 일본으로 도항에 적극 나섰다. 부산-시모노세키를 경유하던 기존항로에 비해 시간이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고, 뱃삯도 저렴했기 때문에 도민들은 누구나 쉽게 일본으로 출가할 수 있었다.
제주-오사카 직항로는 성산포, 세화, 김녕, 조천, 산지항, 애월, 한림, 협재, 신창, 모슬포, 대포, 서귀포, 위미, 표선 등 15곳 항포구를 거쳐 다시 성산포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로 들어가기까지 4일에 걸친 항해길이었다. 직항로 개설 초기에는 제우사와 아마사키기선 등 2척의 배가 매달 2∼3회 운항했다. 1920년대 중반 조선우선과 제주도기선이 가담했고, 1930년대 초에는 아마사키기선, 조선우선, 기업동맹, 동아통항조합 등 4사가 경쟁하며 매달 6회 이상 배를 띄웠다.
폭풍우로 인해 군대환, 복목환 등이 제주해상에서 좌초 조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주도내 항포구에는 접안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종선(부선)을 띄워 여객을 바다에 떠있는 배까지 실어날랐는데, 산지항·조천·대포·표선·모슬포 등지에서는 종선이 풍파에 휘말려 침몰하여 주민들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사건이 빈발했다.
오사카 직항선의 운항 경로. 제주도 일주 경유지가 표기되어 있다.
조선일보 1924년 2월 24일 ('제주대판 간 항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눈에서 한라영봉이 사라지면서 출향과 망국의 설움을 가슴속에 안고 오사카로 갔던 제주사람들.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은 오사카지역에 집단 거주하였다. 특히 이들은 이카이노[猪飼野] 지역에 밀집하여 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방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출가자들은 동포들이 운영하던 하숙집에 머물거나 폐가나 가축의 축사 등에 가건물을 짓고 거주했다. 이들은 일본인이 기피하는 고무공·철공·유리공·방적공 등이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까맣게 되도록" 일했다.
무정한 군대환은 무사 날 태와 완, 이추룩 고생만 시켬신고/청천 하늘엔 별도 많지만, 내 몸 위에는 고생만 많구나/이 몸은 이추룩 불쌍허게, 일본 어느 구석에 데겨지고/귀신은 이신건가 어신건가, 날 살리젠 올건가 말건가/나신디 날개가 이서시문 날앙이라도 가구정 허건만,/날개가 어신 것이 원수로다/(신재경, ‘재일제주인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인용)
군대환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 고향 생각하며 불렀던 노래 가사에는 그 시절의 애환이 잘 담겨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공업지대에는 제주사람들이 많아져 1934년에는 5만45명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총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제주도 역사상 조선초기 대거 출륙(出陸)에 이은 또 하나의 엑소더스였다.
제주-부산-시모노세키 경유 노선과 제주-오사카 직행노선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연재 취지=제주-오사카 직항로의 개설은 일본자본에 휘둘린 게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일본 진출 의욕과 향토자본의 선도에 따른 결과였다. 1920년대 부산에서 관부선을 타고 오사카로 향하던 제주사람들이 직항로를 개척한 것이다. 1923년, 1924년 조선일보에는 '제주대판항로'라고 명기하여 눈길을 끈다. 통상 '관부선(關釜船)'이라고 부르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제주를 중심에 둔 자주적인 움직임이 눈에 띈다.
군대환 취항 100주년이 아니라,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판제항로가 아닌 제판항로. 일본자본의 군대환·경성환이 아닌 우리 자본의 우리 배 순길환·교룡환·복목환, 그리고 제주 자본가들의 움직임. 이번 연재가 주목하는 대목이다. 식민지시대 암울한 강점의 질곡을 뚫고 이겨나간 제주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을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