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의 하루를 시작하며] 김의봉을 생각한다

[김동현의 하루를 시작하며] 김의봉을 생각한다
  • 입력 : 2023. 12.13(수) 00:00  수정 : 2023. 12. 13(수) 13:53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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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제주 4·3특별법이 개정되고 희생자 보상이 본격화되고 있다. 과거에 비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형을 선고받고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던 수형인들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고 무죄 선고도 내려지고 있다. 법원의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이제 죄 없수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이제는 정말 봄이 오는가'라는 기대도 한다. 하지만 그 환호의 뒤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한 금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반공주의다.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 자들'이 아닌, 그야말로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내려지는 무죄 선고다. '죄 없는 양민'이어야만 받을 수 있는 무죄 선고다. 지극히 당연한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70여 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막힌 일이기에 그 자체에 감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무고한 양민'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당시의 다양한 욕망과 열정을 지워버리게 만든다. 4·3항쟁 이전에 있었던 3·10 총파업에는 제주도민 대다수가 참여했다. 민간인뿐만 아니라 도청 공무원도 함께 했다.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제주도민들의 당연한 요구에 미 군정과 경찰은 폭력으로 응수했다.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항쟁 당시 조천중학원 학생들이 입산을 한 이유도 자신의 친구였던 김용철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해방이 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시대적 욕망 또한 만만치 않았다. 4·3 항쟁에 참여한 후 일본으로 밀항했던 김민주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항쟁의 이유를 '인민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민'이라는 말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해방기 '인민'이라는 용어는 지금으로 치면 시민이자 국민이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말 그대로 피플, 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욕망을 '무고한 양민'이라는 표백된 언어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조르조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를 물었다. 죽은 자들은 증언할 수 없고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은 당대의 사실들을 초과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지적처럼 시간은 살아남은 자들의 현실을 초월하며, 기억은 오늘의 몸에 다 담을 수 없다. 말이 아니라 침묵을, 언어가 아니라 언어가 되기 이전의 소리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제주 4·3 공원 각명비에는 지워진 이름 하나가 있다. 조천 와흘 사람 김의봉. 이덕구 이후 무장대를 이끌었던 그는 여전히 잊혀진 이름이다. 살아서는 숨어 다니고, 죽어서는 기억되지 못한 이름, 어찌 그 이름뿐이겠는가. 제주 4·3의 정의로운 해결은 기억되지 못하는 이름들을 역사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진 사라진 숱한 김의봉'들'을. <김동현 제주민예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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