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한라산 말고 또 무슨 산이*-이이향
화산으로 가득한 화산들이
제 하늘을 데리고 먼저 가버린 월정(月汀)
해변이 목덜미를 만지다 달아나고
숱한 오름들 그림자를 물어다 품에 숨긴 채
달아, 너는 너대로 가버려서
바다에 들어앉은 제주
제주는 바다를 모른다고
은하수를 붙잡아
달을 닮은 물가를 지키는
고단함이 어찌 한라산(漢拏山)만 하겠습니까!
*「제주에 한라산 말고 또 무슨 산이」 부분
삽화=써머
"월정여관 간판 아래/불 밝힌 동백이" 있고, 월정리 해변에 "바다를 보러 왔는데도 바다가 보고 싶은" 화자는 있다. 화자가 시인 자신일 테니까 우리는 시인에게 물을 수 있다. 여행이 다소간 아무것도 아니다시피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일이 있지 않은가. 제주에 왔다는 사실은 덜 중요할 수 있다. 문제는, 드디어 무엇을 보게 되었나? 시인은 홀로 남겨져 "가버린" "달아나고" "가버려서" "모른다고" 같은 단어들이 잔해처럼 남은 앙상한 심상을 본다. 그 세계 속에 한라산의 자태는 어둠이 묻은 채 아슬하다. 들어낼 수 있는 것을 모두 끌어내고 안을 수 있는 것을 모두 끌어안은 한라산의 하루 일과. 그 고단함의 경이. 그 안에 자신의 울음도 있어 보내고 떠나버린 것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촉수는 빛을 발한다. 한라산의 상징은 너무 커서 누가 무어라 갖다 붙여도 틀리다 할 수 없다. 나무 한 그루, 그 가지 하나의 옹이에 불과한 인간의 작은 상처와 외로움을 한라산이라 해도 좋지 않나. 그리고 모른다 하고 가버린 것들이 어느 날 한라산을 떠났다 돌아오는 것이다. 제주에 한라산 말고 산이 많다는 말이나, 이름을 갖거나 못 가진 제주의 모든 오름과 산들과 마을이 다 한라산이라는 말이 다르지도 않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