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지난 설 명절에 제주문예회관 '춘망 싹틔운 필묵' 서예개인전을 관람했다. 작품을 함께 보던 관광객 한 사람으로부터 "서예는 오래된 먹 글씨로만 알고 있는 데, 서예의 현대성이 무엇이냐?"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받았다.
서예는 선(線)의 예술이다. 기계적 선이 아니라 서자의 성정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표출되는 필선(筆線)의 예술이다.
이러한 서예의 특성은 서예장르가 아닌 주변예술에서 더 효용성을 드러낸다. 20세기 미술사에 큰 획을 남긴 추상표현주의나 이후의 현대미술에서 보이는 서체주의적 경향이 그렇다. 우리시대에 서예의 시대성 회복이 더욱 간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글씨로 의사를 전달하는 서예의 실용성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예교육은 임서 중심의 도제식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체를 익히는 일에만 치중하다보면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게 된다. 필체가 활자로, 다시 디지털화된 음성과 영상으로, 이제는 AI의 도전 속에 서예가 생존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법첩을 오래 공부하다보면 글씨가 법서에 기준을 두면서도 취향과 습관에 의해 변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교양과 자신의 품성이 내면적 바탕이 되어 독특한 자기심미를 갖추게 된다.
서예가가 '글씨를 잘 써야 한다'는 건 당연한 말이다. 다만 잘 쓴 글씨만으로 이 시대에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정성껏 오래 썼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창신(創新)이다.
서예에서 창신의 바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글자모양과 필법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예의 사상과 풍조의 변화를 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외적변화 후자는 내적변화라 하겠다.
아무리 훌륭한 법서일지라도 임서만으로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각언어를 창조할 수 없다. 그것은 옛 사람 흉내를 내어서는 옛사람, 옛것의 테두리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우리를 에워싼 환경에 적응하며 전통 속에서 자아를 발견했을 때 탄생하는 독창적 심미세계다.
요즘 서예의 현대성을 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서예는 읽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자기 확신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드문 것도 사실이다. 쓰는 것 이상의 초월한 '그 무엇'을 찾는 자기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에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서예가라면 개성과 시대심미를 드러내는 자기만의 세계를 준비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3500년 서예역사 속에서 글씨 잘 쓴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들 중에 시대성을 반영한 자만이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깊이 새겨볼 말이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