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구도의 구도
  • 입력 : 2024. 05.24(금) 00:00  수정 : 2024. 05. 24(금) 22:32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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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벗어날 탈'.

[한라일보] 영감은 떠오르지 않고 번뇌는 따돌릴 수가 없다. 겨우 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일에도 말이다. 삶이라는 광야에서 맞닥뜨리는 언덕과도 같은 이 순간들은 그렇게 우리를 스스로의 안으로 깊이 골몰하게 만든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언덕 앞에서 우리가 겪는 마음의 문제다. 마침내 언덕을 오르면 시야가 넓어질 것 같고 숨통이 트일 것 같지만 오름의 끝에서는 또 내려올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몸과 정신을 집중하면 열릴 수도 있을 가능의 세계와 번뇌와 영감이 서로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미지의 세계. 평탄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동시에 고통과 환희로 가득한 두 세계의 경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2024년 상반기에 개봉한 한국독립영화인 서보형 감독의 '벗어날 탈'은 세계의 경계에 놓인 두 사람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길어 올린 깊숙한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지는 흥미로운 영화다. '벗어날 탈'에는 영목과 지우 두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영화 내내 타인과 접점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둘 모두 오로지 홀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 영목은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하려 하고 지우는 언제 떠오를지 모를 영감의 방문만을 숨죽여 기다린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영목은 모든 관계를 끊고 단기 아파트를 임대해 108배와 좌선에만 몰두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한다. 단조롭지만 단정한 일상을 유지하며 구도자의 형태를 만들어가던 그는 예기치 못한 존재와 맞닥뜨리게 된다. 영목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보이는 지우는 전시회를 앞둔 아티스트로 좀처럼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영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영감보다 먼저 그를 찾아온 것은 과거에서 온 한 남자의 기억이다.

'벗어날 탈'은 물과 불, 삶과 죽음, 하나와 둘 등 상반된 요소들이 미세하게 충돌하며 만들어낸 파열의 이미지들을 4:3의 화면비로 전시하는 영화다. 영화는 프레임을 화폭처럼 섬세하게 사용하며 동적인 움직임들을 정적으로 가두는 시도를 적재적소에서 보여준다. 그래서 70여분의 러닝타임은 마치 전시장을 천천히 거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물들이 서로 나누는 대사가 거의 없고 관념적인 내레이션만이 존재하지만 영화는 지루하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전개된다. 영상과 음악, 멈춤과 이동 등 영화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 또한 '벗어날 탈'에서는 훌륭한 도구들로 이 구도자들의 실험을 위해 충실하게 복무하기 때문이다. 영목과 지우가 원하는 것들 또한 상반되게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영목과 새로운 작품의 탄생을 목도하기 위해 영감을 염원하는 지우는 각각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인물들처럼 보인다. 둘의 접점을 찾는 것은 요원한 일로도 느껴진다. 영목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채 공포와 맞닥뜨린 후 균형을 잃고 지우의 영감은 지우고 싶던 기억에서 시작해 불이 붙는다. 죽음과 탄생, 삶과 결말을 오가던 이들은 기묘하고 신비로운 상태로 접점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영화 초반의 문구처럼. 마치 물고기가 물을 찾는 것처럼.

소설가 권여선의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는 질문을 대답으로 사용하는 인상적인 문답이 존재한다. 이를 빌려 '벗어날 탈'의 많은 질문들에도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번뇌에서 어떻게 벗어나? / 우리는 번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영감은 어디에서 찾아와? / 영감은 어디에서든 찾아와. '벗어날 탈'은 영화의 많은 순간들에 열 수 있는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영화다. 관객은 어떤 문을 통해서든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또 어떻게든 나올 수 있다. 실험 영화의 매력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단순하지만 깊고 아득한 서사를 선보이는 영화 '벗어날 탈'은 더 많은 관객들이 만나기를 바라게 되는 영화다. 영화가 남긴 질문들이 각자의 꼬리로 이어져야 훨씬 더 풍성한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뇌와 영감의 숨바꼭질 사이에서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이 작품과 마주치기를, 그래서 무엇이든 깨트릴 수 있기를.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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