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3) 아라동 월평마을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73) 아라동 월평마을
목축문화의 전통 꽃피워낸 결속력 강한 마을
  • 입력 : 2024. 09.20(금) 04:4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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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다라쿳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섬 제주의 고유지명 중에서도 이색적이다. 달 아랫마을, '달 아래 떠오르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들래오름이 주거지역에서 가장 가깝다. 한문으로는 月下岳, 月來岳. '다라'를 달로 생각해 표기하면서 마을 이름이 월평리가 된 것이다. 탐라순력도에서는 마을 명칭이 別羅花라고 표기되어 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을지에 나타난 해석이 참으로 흥미롭다. 한자를 차용해 나타낸 것으로 別은 다르다는 뜻에서 온 것이고 羅는 발음 그대로 라이고, 곳은 발음이 꽃과 유사해 花를 쓴 것이다. 한글로 쓰면 쉬운 것을 꼭 한문을 고집했던 모습. 다라쿳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음이 되어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신창근 마을회장

한라산 북쪽 중산간 지대에 참으로 포근한 느낌을 주는 지세가 있어서 경이롭다. 동쪽으로 가니모루 능선을 넘으면 강각씨내(無頭川)까지는 평탄하고, 남쪽으로 던덩모루를 넘으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목장지대까지 이어진다. 한라산 방면으로 올라가면서 쌀손장오리와 돌오름까지 영역이다. 북쪽으로 병이동산과 중이동산이 높고 낮은 능선을 형성하면서 중심지점에서는 시각적으로 분지의 느낌을 받는다.

전해지는 설촌의 역사는 약 4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선조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라고 한다. 1429년(세종11년) 제주도 중산간 목초지를 한라산 중심에서 돌아가며 10개의 목장으로 구분해 국영목장을 만들 당시에 이곳 다라쿳 지역은 3소장에 속해 있었다. 해발 300m에서 500m에 이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초지는 마소를 키우기에 적합한 천혜의 자원이었다. 그 3소장을 기반으로 하는 생존공간이 마을의 시원이 되었다는 의미. 마을 어르신들이 유년시절, 4·3 이전까지 모습은 남쪽 동산지대에 올라가면 나무 한 그루 없는 목장지대였다. 화입을 해서 잡목들은 매해 태워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풍광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 너른 초원의 모습이 천고마비의 계절에 영주십경의 하나인 고수목마(古藪牧馬) 풍경 그대로였을 것이다.

4·3 당시에 소개령으로 그 아름답던 마을이 모두 불타고 주민들이 해안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고생하며 살다가 올라와서 집들을 재건하려고 해도 나무를 구하려면 한라산 방향으로 4㎞ 정도 올라가서 겨우 작은 나무를 해서 두 팔로 끌고 와야 했다.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100마리 이상 마소를 키우는 가구가 있었고 대부분 수십 마리는 가가호호 키웠다. 70년대 초반까지 주민의 90%가 축산에 종사했던 부촌이었다. 다라쿳은 전통적으로 목축을 중심으로 밭농사와 함께 번창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창근 마을회장에게 월평마을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어머니같이 늘 포근한 풍광"이라고 했다. 경관자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평화롭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마을 안과 동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한라산 능선이며 오밀조밀한 높낮이가 형성시키는 다양한 시선들이 마치 고향하면 떠오르는 어머니를 연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도농복합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발전적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화된 지역과 접근성이 편리한 강점을 살려나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노력이 눈부시다. 신창근 마을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제시하는 미래지향적 비전 중에 '목축문화박물관' 건립과 운영이 감동적이다. 목축문화를 기반으로 살아온 조상들의 숨결을 마을정체성으로 확립해 후세에게 알릴 수 있는 사업이야말로 '축산1번지 다라쿳'이라는 옛 영광을 되살리면서 마을공동체가 일자리 창출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시대정신과 함께하면서 전통적 마을 역사를 자원화한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분야의 기관과 단체가 협력을 모색해야 할 일이라는 공감대가 흐르고 있었다.

다라쿳이라는 마을과 목축문화는 두 개의 강력한 조합이 이뤄낼 성과를 생각하면 행정당국이나 월평리와 상생관계를 지닌 기관 등에서 그냥 구경만 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해있지 않다는 것 또한 주목할 일이다. <시각예술가>



소박한 아침 풍경
<수채화 79cm×35cm>


연필이 주는 질감을 많은 부분 살리면서 담채화가 주는 강점으로 마을 안쪽에서 만난 풍경을 그렸다. 아침 9시 정도의 태양광선이 발생시키는 그늘과 그림자들이 다양한 물상들의 화면 구도 속에서 짜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볼거리가 있는 풍경보다 이 평범한 일상성이 전하는 메시지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은 너무도 서민적인 우리네 모습이기에 그렇다. 몇십 년 전까지 없었던 전봇대와 통신시설들이 초록 나무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문화융합의 현장이겠거니와 오늘의 다라쿳마을 풍경이라는 생각에 그린 것이다. 옛 돌담에 시멘트를 바른 포근함이 그늘 속에서 정겨움으로 다가오니 연필 이외에는 저 서정성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화면 구성을 위해 구도를 잡다 보니 온전하게 전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별로 없다. 중심에 있는 작은 나무와 빈 화분뿐. 그래도 자신이 위치에서 아침 햇살 눈부신 오늘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전체적인 하모니는 평화로움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서로서로 치열한 긴장관계를 빛과 그림자라는 연산법칙을 가지고 보여주고 있다. 집합으로 치환하면 교집합의 연속인 그림으로 간주될 평범한 아침. 저기 길 끝, 숲처럼 우거진 나무 사이로 걸어가면 어떤 미지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이 풍경을 그리게 된 것이다. 길과 집이라고 하는 너무도 단순 명쾌한 구조 사이에 이리도 많은 요소가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공간감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장치가 화면 가득 심포니를 연주하고 있다.



산, 내, 길 - 다라쿳 으뜸화음
<수채화 79cm×35cm>


구월 중순의 가을 아침은 긴 초록의 퇴적으로 싱그럽다. 산이 맞이하는 아침과 작은 냇가에서 맞이하는 아침, 그리고 냇가를 따라서 난 농로길이 맞이하는 아침 햇살은 모두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로 놀았을 때 그러한 것이지만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고 화면 속으로 포획되어 들어온 이런 상황에서는 공존의 아름다움을 발생시키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길. 인간들이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을 자연은 있는 그대로 실천하고 있으니 부럽기도 하다. 그 옛날 목장지대였던 시절엔 나무 한 그루 없었으니 이런 풍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한라산의 위엄은 그대로였을 것. 냇가 옆에 덮인 칡넝쿨이며 다양한 풀과 나무들이 아침부터 바쁘게 광합성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뚜렷한 명암이 발생시키는 강렬한 광선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화면 속, 산과 길이 대각선에 가까운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길과 내를 따라 오르기만 하면 저기 저 한라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 모두가 한 음절 단어들이다. 산, 내, 길. 원초적인 것들은 긴 단어가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림으로 들어온 저들 또한 너무도 명확하다. 다라쿳이 보유한 시각적 자산을 찾아 그리려 하였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길에서 발견한 소중한 가치를 담아내려.

멀고 가까움이 무슨 소용이랴 그림이라는 집 속에 함께 살면 식구가 된다.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우려 해도 조화로움이라는 정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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