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6·18의거와 기억의 책임

[김양훈의 한라시론] 6·18의거와 기억의 책임
  • 입력 : 2024. 09.26(목) 00:00
  • 송문혁 기자 hasm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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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1948년 4월 3일의 무장대 봉기 이후 엄중한 시국의 연속이었던 제주 섬, 6월 18일 갓 자정이 지난 시각이었다. 문상길 중위와 여덟 명의 부하들이 진급 축하주에 취해 깊은 잠에 빠진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했다. 손선호 하사가 쏜 두 발의 총알이 머리와 심장을 관통했다. 목숨을 건 거사의 목적은 민족반역자 처단이었다.

거사 후 석 달이 지나, 6·18의거를 주도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총살형 집행은 1948년 9월 23일 오후 3시, 수색의 망월산 기슭에서 있었다.

아직 형장의 위치는 분명치 않고, 무덤의 행방은 묘연하다. 그뿐이 아니다. 두 사람에 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6·18의거에 대한 진실 왜곡이나 사실 날조뿐이 아니다. 누군가 기억의 단초들을 없애버렸음이 역력하다. 또 한편 제주 민중을 살리기 위한 의거였음에도 어찌하여 제주 4·3평화공원에는 그들의 뜻을 기리는 기념물 하나 없는 것일까?

문상길의 고향 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무려 72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안상학 시인의 '기와 까치구멍집'이란 시를 통해서다.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안동의 이식골은 임동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낙동강 지류 대곡천의 동쪽 양지마에 있다.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동향한 마을은 양지마, 서향한 마을은 음지마라고 불렀는데, 양지마을 음지마을이란 뜻이다. 마령리는 조선 중종 때 뿌리를 내린 남평문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 후 종손은 종택을 남겨두고 이상룡 일가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의 성지 만주로 떠났다.

이에 비해 박진경은 경남 남해군에서 친일단체의 간부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달삼과 맺은 4·28평화협정을 실행하려다 온갖 방해공작으로 실패한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부임한다. 연대장 취임식에서 자기 부친은 일제의 '대정익찬회'의 중요 간부였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면서, 그는 독립을 방해하는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양민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고, 딘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지난 23일 오후 3시, 사형일 그날 그 시각에 맞추어 수색의 망월산 기슭에 제주 사람들이 모였다. 문상길과 손선호 하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6·18의거를 기리는 세 번째 진혼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주최는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제주통일청년회,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였다.

6·18의거를 결행한 의사들의 희생에 이어서 뒤에 남은 친가족들은 남모르는 박해를 받았다. 너무 늦었지만 그들의 의거를 기리는 진혼제를 올리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망월산 기슭에 6·18의거를 기리는 추모비라도 세웠으면 하는 소망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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