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내부세요

[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내부세요
  • 입력 : 2025. 12.10(수) 02:3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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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마트 안 햅쌀로나 가을의 복판임을 가늠하던 시월. 서울 사는 조카 둘이 우리 집을 찾았다. 아내는 아침부터 지지고 볶더니 밥솥에서 보리밥을 퍼내고 흰쌀을 씻어 안쳤다. 밥 짓기가 끝나자 주걱을 들고 와 내민다. 식욕은 불끈하는데 줘도 못 먹는 신세. 있는 밥 놔두고 흰쌀밥이냐며 강짜를 부렸다.

곤밥. 보리밥, 범벅밥 먹던 시절에 흰쌀의 자태가 너무 고와서 '고운 밥'이라 이른 말이다. 어려서는 없어서, 나이 들어서는 몸에 든 병 탓에 먹지 못하니 이래저래 내게 곤밥은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곤밥 먹고 서울말 쓰는 조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에 누웠다. 양 뺨이 아리고 잊었던 그녀가 아른거렸다.

고등학교 때 '쓰레빠' 선생님이 있었다. 봄날같이 변덕스러운 성격. 어쩌다 수틀리면 슬리퍼 쌍따귀가 날아드는데, 오히려 '빠따루' 선생님의 은혜가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 지경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불릴까 봐 다들 고개 숙이고 숨죽인 사이, 잠깐 눈을 치켜떴을 뿐이었다. "나와!" 등 뒤로 쉰다섯 가락의 탄식 소리가 흘렀다. "째렸냐?" "아닌데요. 그냥 봤는데요" "그래? 그런데 넌 어디다 대고 이랬어요, 저랬어요 곤밥 먹은 소리야?" 언제 손에 들었는지 '쓰레빠'가 날아왔다. 어차피 맞을 거였지만 억울하기로는 남이장군과 동급. "아니라 마씸. 기냥 베린 거라 마씸!" 악수였다. "뭐? 마씸? 이 자식이 보리밥 처먹고 왔냐? 열중쉬어!"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곤밥에서 끝낼 일을 보리밥 한술을 얹었다가 또 처맞은 울분은 나만의 것이 아닐 터. 서넛은 욕설이 길었고 두엇은 한숨만 깊었다. 뭘 빌리라는지 '빌리진, 빌려줘~' 뒷걸음으로 양발을 끌며 똥 누러 가는 놈이 하나 있었고.

보리밥 먹은 말로는 '일노'광장인 곳에서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 버스는 코딱지만 한 시내를 벗어나 달렸다. 곤밥과 보리밥은 풀지 못한 방정식이 돼 차창 밖으로 흩어졌다. 다섯 째 정류소, 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여섯 째, 들국화 무더기 같은 여학생들이 올랐다. 나의 그녀도 있었다. 속앓이하며 곁눈질로만 봐야 했던 그녀가 큐피드 화살을 맞은 듯 내 자리로 다가와 섰다. 따라오던 아카시아향은 멈추지 못했고 정신이 아찔했다. 일기일회라, "가방 이리 주세요" 회심의 곤밥 먹은 말에 그녀는 청아한 미소를, 나는 침이 꼴깍.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나의 소녀가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내부세요"

당목 맞은 범종처럼 머리가 울었다. 곤밥, 보리밥을 아우른 고차방정식의 해법. 숨기고 미룰 일이 아니었다. 뒷날, 학교에서 친구들을 모았다. '경햄써요, 고라보세요' 통합과 융합, 짬뽕과 비빔밥을 이야기했다. '쓰레빠'의 후폭풍은 예견하지 못했고 친구들은 모두 '동의하는 바가 매우 크므로 금일부 실행에 강력한 의지가 있음'을 천명했다. '내부세요'가 차비를 내달라는 말이라던 빌리진 녀석만 빼고. <신순배 수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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