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2010년, 예술가 훌리에타 아란다(Julieta Aranda)와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은 '이플럭스(e-flux) 타임뱅크'라는 프로젝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예술가와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돈이 아닌 '시간'을 단위로 서로의 재능을 나누는 이 실험은 예술계를 위한 일종의 대안경제였다. 번역을 해주면 '아워 노트'라는 시간 화폐를 벌고, 그것으로 디자인이나 전시 설치 도움을 받는 식이다. 개념미술가 로렌스 와이너가 디자인한 화폐 도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면서, 동시에 돈이라는 것 역시 결국 사회적 약속이자 디자인의 산물임을 상기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메시지는 단순하지만 묵직했다. 시장에서 가격표가 붙지 않는 문화 노동에도 가치가 있으며, 화폐가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서로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실험은 제주의 '수눌음' 전통과 닮아 있다. '손들을 눌다(쌓다)'에서 비롯된 이 제주어는 천 년 넘게 이어온 노동 교환의 지혜를 담고 있다. 검질 수눌음에서 열 명의 농부는 서로의 밭을 돌아가며 김을 맨다. 혼자라면 열흘 걸릴 일을 함께 모여 닷새 만에 끝내는 식이다. 여기서 교환의 단위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내가 네 밭에서 하루를 쓰면, 너는 내 밭에서 하루를 쓴다. 이 단순한 등가교환 속에서 화폐 없이도 가치가 오갔다. 과부나 노약자처럼 노동을 되갚기 어려운 이들에게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빚은 있되 독촉은 없는 이 시스템에서, 갚지 못한 노동은 공동체가 조용히 떠안았다. 관계가 지속되는 한 빚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순환될 수 있다는 믿음이 수눌음을 지탱했다.
e-flux 타임뱅크가 전 세계를 잇는 온라인 네트워크였다면, 수눌음은 화산섬의 척박한 땅에 발 딛고 선 대면 공동체였다. 하지만 두 모델이 증명하는 바는 같다. 자본이 없어도 교환은 가능하며, 노동은 시장 바깥에서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출판예술 영역에서도 유사한 실험이 진행 중이다. 취리히와 베를린에 기반을 둔 모토 디스트리뷰션(Motto Distribution)은 전 세계 20여 개 독립예술공간과 '스왑 네트워크'를 운영하며, 참여 매장들이 서적을 화폐처럼 상호 교환한다. 베르겐 쿤스트할, 멕시코시티의 카사 보스케스, 브뤼셀의 빌스 등이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데, 여기서 책은 상품이 아니라 관계를 매개하는 화폐가 된다.
제주에서 이 실험은 이미 뿌리를 갖고 있다. 해녀들이 불턱에서 물질 기술을 나누고, 서툰 애기해녀의 망사리에 자신의 수확물 한 웅큼을 덜어주던 것처럼, 누구든 서로의 시간을 나눌 수 있다. 대안경제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결국 관계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화폐의 형태가 달라지면 교환의 문법도 달라지고, 그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의 질 또한 변화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의 자리에 시간이 만든 예술을 대입해서 읽어도 무방하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기사제보▷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