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부분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지만, 최근 서점가의 흐름은 그 통념을 조용히 뒤집는다. 종이책 판매량은 오히려 늘고, 두껍고 어려운 책들까지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지능이 넘쳐나는 시대에 사람들은 왜 굳이 종이를 넘기며 느린 활자로 되돌아가는가.
1980년대, 최승자 시인은 관념과 비유의 회로를 걷어낸 자리에 '콘크리트 벽'을 세웠다. 사랑조차 오늘의 닭고기를 씹고 눈물을 삼키는 노동으로 환원되던 시절, 실존은 벽에 부딪혀 바스러지는 감촉으로 겨우 증명되었다.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지능은 손끝의 움직임 하나만으로 누구에게나 닿는다. 지식의 정수는 화면 너머로 공평하게 건너오고, 연령과 계층을 가로질러 똑똑한 조력자가 곁을 지킨다. 얼핏 오래 꿈꾸던 지식 민주주의가 이뤄진 듯하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접속만 하면 닿는다는 그 평등함부터가 반쪽짜리 약속일지 모른다. 정교한 지능일수록 값을 요구하고, 그 값을 감당할 수 있는 이와 없는 이의 격차는 벌어진다. 문턱은 낮아졌으나 그 안의 방들은 여전히 나뉘어 있다. 그 안에서도 균열은 감지된다. 짧은 음성 표본으로 복제된 딥페이크가 목소리를 탈취하고, 평생 바쳐온 지적 노동의 가치가 순식간에 휘발되는 일터마다 정체 모를 불안이 번진다. 알고리즘이 촘촘히 설계한 화면 속에서 아이들은 가짜 정보와 숏폼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야 하는 피로가 일상 위에 더께처럼 내려앉는다. 지능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끝내 대신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 끝에 언어가 있다.
생성형 지능이 직조하는 문장은 매끈하고 결점이 없다. 슬픔을 겪어본 적 없이 슬픔을 모사하고, 경험한 적 없는 소멸의 서사를 기막히게 요약한다. 그러나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언어는 잠시 눈길을 붙들 뿐, 곧 헛헛함을 남긴다. 몸이 없는 지능은 아플 도리가 없다.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바스러질 몸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시가 오늘날 전혀 다른 울림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인공지능이 삶의 모든 번거로움과 관념을 매끈하게 다듬어줄수록,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무해함 속에서 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우리가 고전을 펼치고, 때로 고통스러운 타인의 서사에 굳이 시간을 내어 머무는 까닭은, 실존의 한계와 상처가 알고리즘이 대신 짊어져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가상의 매끄러운 비유를 넘어, 내동댕이쳐진 생의 구체성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일. 기술이 대신 아파줄 수 없는 그 콘크리트 벽 앞에서, 인간의 서사는 다시 시작된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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