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2)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간옹 이익(李瀷)과 김만일의 딸(2)
당대 최고의 지성과 제주 명문가의 결합
  • 입력 : 2012. 01.16(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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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김만일의 묘와 묘비. 묘비에는 김만일이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음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석과 함께 문인석이 남아있지만 동자석 2기는 누군가 훔쳐가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김만일 일가에서는 그가 어떻게 조선 최고의 말 부자가 됐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난한 집 출신에 고아나 다름없던 김만일은 성산읍에 있는 어느 목장에서 말테우리로 일을 하다 주인집 딸과 눈이 맞는다. 딸이 이미 임신해버린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말테우리와 함께 딸을 내쫓으면서 못 이기는 척 말 한 마리를 내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낙담한 김만일이 집을 나온 지 3일 후 종마를 찾아 나선 암말 50마리가 눈앞에 나타난다. 주인집 딸이 평소 눈여겨본 종마의 혓바닥에 일주일 전부터 바늘을 꽂아 여물을 못 먹게 해 아버지가 그 말을 내줄 수 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이익이 제주에서 얻은 여인은 바로 이 부인의 딸이었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될 당시 제주목사는 후일 인조반정에 참여해 광해군을 폐위시킨 데 이어 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고 한양까지 점령한 무관 이괄이었다. 그는 제주목관아 서쪽에 이익의 거처를 얻어주고 동몽교관(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종9품)으로 삼아 특별대우했다. 일반인과 접촉을 금하는 유배인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그가 반정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이익의 작은아버지가 북병사(병마절도사·종2품)인 데다 사촌이 후에 우의정까지 오른 이완 대장이었으며, 이익의 학식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익에게 배운 제자로는 훗날 과거에 급제해 각각 성균관 전적(정6품)과 참봉(종9품) 벼슬을 받은 고홍진과 김진용 등이 있다.

김만일이 딸을 이익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해군 즉위 후 사복시는 선조 때부터 조정에 말을 바친 김만일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으며, 점마관 양시헌은 왕의 명령을 핑계로 암말 1000필을 뽑아 갔다. 이를 항의하는 김만일과 세 아들에게 형을 가한 양시헌은 임금의 명령으로 파직됐지만 사복시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수탈당하느니 헌납하기로 마음을 먹은 김만일은 1620년(광해군 12년) 말 500필을 바쳤으며, 광해군은 그를 불러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부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 실직을 제수해 부임하게 하고, 그의 장남에게는 수령(현감), 차남에게는 당상(정3품 이상), 손자에게는 변장(만호)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도성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부총관 직책은 종실(임금의 친족)이 맡아야 한다며 김만일 일가에 내린 관직 제수 명령을 거두어들이라고 거듭 상소한다. 그들은 김만일을 "바다 밖의 미천한 인간", "섬 속의 일개 말 장사꾼"으로 비하하기도 했다. 결국 김만일은 실관직이 제수된 지 3개월이 지난 후 사직 상소를 올리고 귀향한다. 사관은 당시 임금이 김만일에게 벼슬을 내린 것을 두고 '사람들이 모두 너나없이 수치스럽게 여겼다'고 깎아내렸으며, '출사한 지 며칠 만에 가고 말았다'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중앙 관직을 경험하면서 임금의 실정을 깨닫고, 그 자신이 사간원의 서슬 퍼런 상소를 당해본 데다 왕족 출신 목사들에게도 괄시를 받았던 김만일은 앞날을 대비해 사간원 정언을 지낸 이익을 사위로 맞는다.

그때 이익은 첫 부인이 자식 없이 사망하고, 아들 인실과 딸을 낳은 둘째 부인도 상소문 사건이 나던 해 세상을 떠나 혼자였다. 유배 온 이듬해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를 배필로 삼은 그는 차남을 낳고 인제(仁濟)라 이름을 짓는다. 일부 관리나 유배객이 제주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나 '영(瀛)', '탐(耽)'자를 쓴 것처럼 인제의 이름에도 제주를 기억하는 '제'를 넣었던 것이다. 인제는 훗날 훈련원(무예 연습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판관(종4품)에 오르기도 한다.

유배가 풀려 귀향한 이익은 제주에서 장가들어 얻은 자식의 존재를 친지들에게 당당히 밝힌다. 영의정 최석정이 지은 이익 묘비명 중 "세 번째 장가들어 훈련원 판관 인제를 낳았는데 이는 유배 때 출생했다"는 글과 이익 손자가 작성한 가장(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 "헌마공신 만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인제를 낳았는데 제주적거 때 출생했다"는 내용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유배가 풀리면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자식까지 버린 상당수 유배인과 달리 그는 아들을 호적에 올렸으며, 이후 김진구와 김춘택 등 제주에 유배 온 지식인들은 그의 후손과 제자들을 찾아가 사제지간을 맺어 이익이 형성한 학맥을 이어갔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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