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제주섬 특유의 주거유형 우도에서 확인

[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제주섬 특유의 주거유형 우도에서 확인
  • 입력 : 2002. 11.06(수) 12:34
  •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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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섬 속의 섬을 가다

(4)우도의 선사문화


전혀 뜻밖이다.

 우도에서 동굴입구집자리가 확인된 것은 ‘섬 속의 섬’의 고고학적 다양성을 시사해준다.

 지금껏 제주의 동굴입구·바위그늘집자리는 본섬에만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우도 동굴입구집자리는 이러한 인식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만큼 주변 섬의 선사문화는 묻혀져 있었다.

 선사인들의 주거지인 동굴입구집자리(Tunnel Dwelling site) · 바위그늘집자리(Rock Shelter)는 제주특유의 주거유형이다.

 왜 그럴까.

 한반도에서는 동굴입구·바위그늘집자리가 구석기시대 보편적으로 이용됐다. 하지만 신석기시대 이후는 아주 드물다. 선사인들은 동굴·바위그늘 대신 야외에 ‘움집’을 만들고 생활했다. 움집이 대표적인 주거지인 셈이다.

 반면 제주섬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반도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신석기부터 탐라시대 후기(기원 500∼900년)까지 일시적 주거지로 계속해서 이용됐다. 제주섬 최초의 정주흔적이 나타나는 2500년전 상모리 유적 단계나, 2100년전 대규모 취락이 조성되던 삼양동 유적 당시에도 여전히 유용한 주거공간이었다.

제주가 대륙과 연결됐을 당시 구석기시대 빌레못동굴을 비롯, 신석기시대 북촌리 바위그늘집자리, 금능리 한들굴, 고산동굴, 신천 마장굴이나 탐라국 형성기 김녕 궤내기굴 등은 고고학의 한페이지를 장식한다.

 제주선사문화는 동굴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동굴입구·바위그늘집자리는 50여개 알려진다. 개발로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화산섬이라는 지질학적 특성 때문이다. 제주섬은 주로 약 160만년전 이후 신생대 제4기(Pleistocene·갱신세·홍적세) 동안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용암동굴 또는 바위그늘이 만들어졌으며, 선사인들에게는 훌륭한 보금자리 역할을 했다.

 우도 동굴입구집자리는 제주 본섬과 주변 섬 사이의 문화전개 양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날 취재에서는 마침 한·일 시·도·현 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제주를 방문 우도를 답사한 일본 후쿠오카현교육청 문화재 담당 시무라 마사유키(進村眞之) · 오바 타카오씨(大庭孝夫) 등 2명도 만날 수 있었다.

 궂은 날씨로 몇번 연기한 끝에 이뤄진 취재였다.

동굴입구집자리는 일명 ‘포제동산’으로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용암동굴이 함몰되면서 생긴 입구 주변은 잡목이 무성하게 얽혀 있다. 동굴내부는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석렬이 이어져 있었다. 석렬 안쪽으로 현무암 자갈로 뒤덮인 둥근형태의 공간이 형성돼 있다. 동굴내부에서는 탐라초기의 표지적 유물인 곽지리식토기편과 회색도기편, 가로 28㎝ 세로 16㎝ 크기의 대형 갈판도 출토됐다.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무렵부터 제주 본섬과의 교류 영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성격규명을 위해서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시무라씨는 “일본에서는 동굴·바위그늘집자리가 극히 드물고 제주에서처럼 후대까지 사용된 것이 거의 없다”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곳의 선사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갈판의 출토는 농경·채집 생활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섬의 여건상 주로 어로생활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계절따라 야외 거주지에서의 어로생활과 병행해서 겨울철 등 기후조건이 열악한 시점에서는 동굴을 집자리로 이용했다.

 이러한 추측은 우도 오봉리· 서광리 일대 유물산포지가 분포하고 이곳에서 탐라초기 유물이 출토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우도 선사인들의 실체를 보여주는 흔적은 또 있다. 고인돌(지석묘)이 그것이다.

 고인돌은 우도 남쪽 성산일출봉과 마주한 해안에 있다. 고인돌은 기본적으로 농경집단의 산물. 일정집단이 있어야 축조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세력가의 등장 등 탐라초기 우도의 계급사회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도 고인돌은 제주동북부 선사문화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조천·구좌·성산을 잇는 제주동북부에서 고인돌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풀어줄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토유물이나 지리적으로 볼 때 제주동북부와 지속적인 교류가 있어왔다는 점에서 우도 고인돌의 존재는 흥미를 안겨준다.

 우도 동굴입구집자리 유적의 발견은 고고학계의 또 다른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우도는 어떤 섬인가

 성산포에서 3.8km, 종달리에서는 2.8km 정도 떨어져 있다. 동서 2.8km, 남북 4.9km의 타원형으로 면적은 6.07㎢(1백83만평), 남한 705개 유인도서 중 76번째로 큰 섬이다. 9월말 현재 4개리(12개 자연부락) 640가구 1,688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남동쪽에 솟아있는 이중 화산구조의 해발 132m의 우도봉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면을 이룬다. 멀리서 보면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소섬’, ‘물 위에 뜬 들판’에 비유해서 ‘연평’(演坪)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도 팔경’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피서지로 유명하다.



[사진설명]제주주변의 섬에서도 처음 확인된 동굴 입구 집자리(위)와 동굴 내부에서 보이는 곽지리식 적갈색 토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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