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5)문충성의 '4월제'연작시

[4·3문학의 현장](5)문충성의 '4월제'연작시
피 젖은 이데올로기에 섬마을 불타다
  • 입력 : 2008. 02.01(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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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성 시인은 4·3 당시 동네 연자 방앗간 앞에서 죽창 들고 보초 섰던 기억을'4월제'란 시에 풀어냈다. 제주시 이도1동 연자 방앗간이 있던 자리는 허물어졌으나 그 날의 기억은 쉬이 지울 수 없다. /사진=김명선기자mskim@hallailbo.co.kr

게다짝, 니뽄또, 日帝 군홧발에 짓밟히던 섬마을

1945년 8월 15일

새 세상 열렸네

친일파들 친일하며 치부하는 동안

억압과 착취와 죽음이여

숨막히던 36년 터지던 만세소리

천지를 새로 여는 자유여 해방이여



빛과 그늘이

어두움 무서움 모르던

닭소리도 한데 어울려 살던 사철

무시로 바람 불던 섬마을에 바다 건너온

피에 젖은 이데올로기들









불질렀네

섬마을들 불이 되었네

죽음 냄새 풍기며

죽음에 미친

까마귀떼 까옥까옥

아침 저녁 밤마다

불타오르던 하늘 하나

가득 날고 있었네



대여섯 살 철모르던 애들

눈곱 낀 울음 속에서도 시뻘겋게

총칼 소리 죽창 소리 거친 발걸음 소리

불길은 타올랐네

(문충성의 '4월제·1'에서)



성지 뒷편 연자 방앗간서 벌벌떨며 보초 섰던 기억
신작로 뚫린 옛 동네 가면 4·3때 죽은 이웃의 얼굴

"살기 위해 숱한 죽음들 구경하면서 도망 다녔네"


제주성지 남쪽의 민가를 한참 찾아 헤맸다. 제주읍 이도리 1508번지. 시인은 지금도 옛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1504번지를 단 집 문패를 찾았다. 이 어디쯤이 아닐까.

'살기 위해/ 숱한 죽음들 구경하면서/ 그림자처럼 도망 다녔네/ 암호 받아 외고 동네/ 연자 방앗간 앞에서/ 죽창 들고 보초도 섰네/ "누구냐! 정지! 암호는?"/ 입 안에서 뱅뱅 도는/ 무서움에 오줌을 쌌네/ 큰기침 소리 우렁차게 어둠속에서/ 시커멓게 나타나던 커다란 사람들/ "이거 어린애 아냐! 빌어먹을!"/ 별도 뜨지 않는 밤하늘/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4월제·2')

문충성(70)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1997)에 실린 '4월제' 연작시 4편중 하나다. 1977년 데뷔한 시인은 '수평선을 바라보며'(1979), '술래잡기'(1987), '그러나 새벽은 아직도 어둡구나'(1988), '설문대할망'(1993), '허공'(2001), '백 년 동안 내리는 눈'(2007) 등 거개의 시집에 4·3의 기억을 담아왔다. 성(城) 뒷동네에 살았던 시인이 그 시절 보고 듣고 겪은 체험담이 녹아있다.

제주읍은 여느 중산간마을에 비해 직접적인 피해가 덜했지만 고통은 매한가지였다. 어렸을 적, 시인은 '남문통'에 '폭도'가 몰려온다는 연락이 동네에 퍼지면 보초를 서야 했다. 남자면 무조건 불려나갔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채는 암호는 까마귀. 보초를 서면 성지가 눈에 걸렸다. 벚꽃나무, 팽나무 아래 뛰놀던 시절은 간데 없고 아이는 벌벌 떨며 암호를 주고 받았다.

보초 섰던 연자 방앗간은 허물어졌다. 그 뿐이랴. 어린 날의 동네는 근대화에 이리저리 밀려 '신작로'가 생겼고, 참새들 새끼치던 초가도 사라졌다. 소 물먹이러 다니던 남수각 냇가도 가물가물하다. 길은 시인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옛 동네에 들어서면 4·3때 죽은 몇몇 이웃들의 얼굴이 환영처럼 스친다. 어느 '귀머거리 할망'의 죽음이다. 당시 오등리 죽성에서 돌덩이로 산폭도가 못넘어오게 성을 쌓은 일이 있다. 그곳에서 군인이 산폭도 연락병이라며 잡아온 귀머거리 할망을 본다. 군인은 군홧발로 차며 심문했지만 할망은 대답을 못한다. 답답한 군인은 할망에게 가라고 외친다. 할망은 무수히 허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하며 허위허위 뛰어가지만 50미터도 못가 거꾸러진다. 총에 맞은 것이다.('4월제·3')

▲숱한 죽음을 구경하며 그림자처럼 도망다녔다는 시인. 관덕정에선 이덕구의 죽음을 봤다.

또다른 죽음도 봤다. 이즈막에 탐라국입춘굿놀이 알림막이 펄럭이고 있는 관덕정 앞마당에서다. 관덕정 주변엔 제주경찰서, 법원 등 아이들에게 '으시시'했던 관공서가 몰려 있었다. 이곳에 무장대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이 내걸렸다. '4·3때/ 관덕정 앞/ 나무 십자가 만들어 매달아놓은/ 이덕구 죽음/ 윗호주머니에/ 꽂혀 있던/숟가락/ 파르스름 녹슬어 있었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 숟가락 보여줬을까'('숟가락에 대하여'에서)

그것들은 개인의 죽음이었지만 제주 사람들의 죽음이기도 했다. 하루 아침에 '폭도'가 되고 '빨갱이'가 되어버린 현실. 접시물에 빠져죽는 세상이었다. 시인은 지금의 제주대병원 서쪽 동네나 동한두기로 여러차례 피난갔다. 뛰면 5분 남짓한 거리였지만 절박했다. 밤에는 그곳에서 보내고 낮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삘기 뽑기하러 들녘으로 내달리고, 개구리 잡으러 시냇가를 휘저어 다니던 아이들이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그 귀머거리 할망과 무엇이 달랐을까. 뜻도 모르는 이데올로기 싸움에 가없이 흔들렸다.

피비린내는 바람은 섬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시인이 1957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서 거처를 구하던 때, 제주 출신임을 확인한 그에게 돌아오던 싸늘한 반응을 잊지 못한다. "방 없어요." 4·3을 겪은 제주 사람에 대한 편견은 깊었다.

만나면 사랑해야 하는 될 인간끼리 패를 가르는 싸움뿐이었던 것은 아닌가. 거기서 이긴 사람은 살아서 옳고, 패자는 언제나 죽어서 나쁜가. 사건이 터진지 40년이 흐른 어느 날, 시인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배고픔을 달래주던 먹쿠실나무(멀구슬나무)에 기대 무자년 봄날을 떠올린다.

'먹쿠실나무 보랏빛 눈물 속에서/ 4·3사건 불타는 죽음을 보았느냐/ 시퍼런 죽창에 찔려 시퍼렇게 죽어간/ 동족상잔의 이데올로기를 보았느냐/ 오손도손 마을 이루고/ 아들낳고/ 딸 낳고/ 농사짓고/ 마소 키우며/ 저마다 사랑 깨우쳐/ 가난가난 사는 사람들/ 총소리에 소리없이 무너지는 폐허를 보았느냐/ 죽어도 차마 감지 못한 눈동자에 제주 바람 정처없이/ 무심무심 떠도는 구름을 보았느냐'('먹쿠실나무의 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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