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4) 김경훈의 '헛묘'

[4·3문학의 현장](14) 김경훈의 '헛묘'
혼백이라도 거둬 볕좋은 곳에 잠드소서
  • 입력 : 2008. 05.09(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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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숙씨와 조카 임성찬씨가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가족 헛묘를 찾았다. 7기의 봉분에 시신을 거두지 못한 희생자 9명의 넋이 잠들어있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초토화작전에 큰넓궤로 피신한 동광 사람들
시린 겨울 토벌대에 붙잡혀 정방폭포서 희생
시신을 찾을 길 없어 헛묘 만들어 넋을 달래


어깨 높이까지 자란 잡목을 헤치고 나갔다. 고사리 꺾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만들어놓은 외마디 길이 길잡이 노릇을 했다. 쇠창살처럼 얽힌 동굴 입구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큰넓궤. 동광목장에 있는 이 용암동굴은 4·3때 은신처였다. 동행한 임성찬씨(59·동광리)가 굴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불빛이 없으면 한치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칠흑 세상이었다. 임씨는 "굴 안으로 죽 들어가면 도리깨질을 할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널찍한 곳이 나온다"고 했다.

"이 굴안네 이 동네 사름이영 저 섯동네 사름이영 백명이 넘게 살암시난 고치 들엉 살게. 이 사름덜이 살민 우리도 사는 거고 이 사름들이 죽으민 우리도 죽는거난 서로들 위안해 가멍 살아가사주"('헛묘')

동광리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작전이 이루어진 1948년 11월 중순 이후 엄청난 수난을 겪는다. 김경훈 시인(46)은 동광리 현지 4·3증언채록을 통해 '헛묘'란 마당극 대본을 집필하고 시를 썼다. 마당극 대본집 '살짜기 옵서예'에 실린 '헛묘'는 놀이패 한라산이 1991년과 2005년에 마당극으로 선보였다.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된 동광리 자연마을인 무등이왓과 삼밧구석. '헛묘'에는 두 마을 사람들이 등장해 그 사연을 풀어헤친다. 불타는 마을을 뒤로하고 차마 길을 떠날 수 없었던 주인공 양태수 노인은 토벌대에 발각돼 총살당한다. 실제 이 무렵 토벌대는 무등이왓에서 30여명을 죽이는데, 이튿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을 보고 그 근처에 잠복했다가 19명을 붙잡아 생화장시켰다.

'거봐, 내 말이 틀림없지/ 저것들이 기어코 나타났잖아/우리가 죽인 다음날이면 거짓말같이 치워지는 것 봤지//그 후론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 사람들은 더욱 깊은 산중으로 올라가 숨었고/ 미친 돼지들만이 꿀꿀대며 시체를 뜯어먹어 더욱/ 미친 세상과 함께 미쳐가고 미친 놈들이/ 미친 돼지를 잡아먹고는 더욱 미쳐/ 사람 사냥에 미쳐 날뛰었다'('고운 아이 다 죽고'에 실린 '잠복'중에서)

시체도 마음대로 거두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큰넓궤를 찾아들었다. '방앗돌 굴리는 노래'를 하며 수눌음공동체를 일궈온 그들은 굴 안에서도 도타운 정을 나눈다. 살육의 현장이었던 동굴 밖 세상과는 딴판이었다. '헛묘'의 '소도리쟁이' 변달려는 그래서 말한다. "여기 오난 사름이 살아지는 거 닮네. 맞다! 어려울 때 진짜로 사름덜이 서로 도우멍 살아지는 법이다."

▲동광리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큰넓궤 입구. 살육의 피냄새가 진동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궜다.

하지만 동굴도 마냥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었다. 큰넓궤가 토벌대에 발각된다. 굴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시린 겨울이었다. 눈밭을 헤치며 영실 인근 볼레오름까지 피신하지만 노인이나 여자, 아이들은 도망치는 게 힘에 부쳤다. 1949년 1월 이들은 서귀포 정방폭포로 끌려가 희생당한다.

임문숙씨(82·제주시 한림읍 동명리)는 정방폭포에서 한꺼번에 가족을 잃었다. "총살당한지 몇해 뒤에 시신을 거두러 갔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는 그는 그 길로 생모와 의붓어머니, 사촌형 부부, 오촌 부부 등 9명의 옷가지 등을 담아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동광6거리에서 서쪽으로 50m쯤 가면 임씨 가족 헛묘가 있다. 2기는 합묘여서 무덤은 모두 7기다. 처음 비석을 세울 땐 4·3이란 말을 언급못했다. 생몰연대를 새긴 게 전부였다. 그러다 15년전쯤 비석을 바꾸면서 4·3때 정방폭포에서 희생되었다는 문구를 넣었다. 동광리에는 헛묘가 또있다. 동광리 김여수씨(75)가 작은아버지 가족을 모셨다. 큰넓궤로 향하는 시멘트길 한켠, 3기의 봉곳한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설운 나 손지야 잘 들으라, 우리 신체 비록 없다마는 혼이마나 감장허영 주민 우리 조상덜 눈을 감아질 듯 허다"('헛묘')

'헛묘'의 인물들은 혼자만 잘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런 심성이 드러난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거두며 평화롭던 시절의 공동체 정신을 더듬는다.

큰넓궤에서 내려오는 길, 삼밧구석 마을터에 놓인 '4·3 사건 위령비'를 만났다. 1999년 4·3당시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세웠다. 마을터에 보리이삭이 하늘거리고, 연보라 무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빗돌에 새긴 문구가 가슴을 친다.

"사삼사건전만해도 순진하고 소박했던 중산간 마을 이곳 사람들은 고향을 빼앗긴 서러움과 너무나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의 슬픈 통곡소리를 먼 훗날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사연을 알리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4·3현장 누벼온 김경훈 시인 "죽임의 이야기 끝내고 이젠 살림의 4·3 詩를"

1982년 가을,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각색한 시극 공연을 준비중이었다. '섣달 여드렛날 밤에'라는 제목으로 대본을 완성했지만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찰이 어떻게 알았는지 대본을 압수했고 몇몇은 조사를 받았다. 당시 제주대의 한 동아리에서 시극 대본을 썼던 이가 김경훈 시인. 그는 '부에가 나서' 그 길로 4·3에 한층 관심을 갖게 됐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조사요원을 지낸 그는 지금 4·3사업소 전문위원으로 있다. 놀이패 한라산 창단 멤버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4·3 마당극 대본을 쓰기 위해 현장을 누볐다. 2000년 마당극 대본집 '살짜기 옵서예'를 낸 데 이어 2003년 3월엔 4·3시집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도서출판각에서 나온 '고운 아이 다 죽고'와 삶이보이는창에서 펴낸 '한라산의 겨울'이다.

두 시집엔 모두 합쳐 1백30여편의 시가 담겼다. 그것들은 끔찍한 학살의 재현이다. 4·3때 '죽이는 방법'이 다 들어있다. 그 참혹한 죽음의 기록을 두고 시인은 '하루에 네 편 이상을 읽지 마시라'로 독자들에게 권했을 정도다.

시인은 그동안 20여편의 마당극 대본을 썼다.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4·3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 최근엔 4·3특집 라디오 드라마 10부작 대본을 맡았다. 4·3의 현장에서 외면할 수 없었던 '죽임'의 연작시를 발표했던 시인은 이제 '살아남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10월쯤 '살림의 4·3'이 한권의 시집으로 묶여나올 예정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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