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17)김시태의 '연북정'-2

[4·3문학의 현장](17)김시태의 '연북정'-2
해방에 들떠 외치던 만세가 눈물이 되어
  • 입력 : 2008. 05.30(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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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 해방후 기쁨에 들뜬 만세소리로 가득 채워졌던 비석거리는 머지않아 4·3을 온 몸으로 헤쳐가려는 사람들의 집회장소가 됐다. /사진=김명선기자 mskim@hallailbo.co.kr

비석거리를 채웠던 고문치사 상여소리
평화회담 기대감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밤바다 헤쳐간 동지는 이어도로 갔을까


술마시다 만세를 외쳤다. 노래를 부르다 기분이 좋아지면 또 외쳤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 조천포구를 거쳐갔던 관리들의 공적을 새겨넣은 비석들이 줄지어선 그곳은 마을의 집회장소였다. 해방되던 해, 기쁨에 들뜬 주민들은 비석거리로 몰려나와 그렇듯 만세를 불렀다.

아무리 굳센 돌덩이라도 시간의 무게를 당해낼 수 없다. 비문을 지우는 것도 모자라 큼지막한 구멍을 빗돌 군데군데 뚫어놓았다. 봄의 한낮, 시멘트로 발라 만든 비석거리 앞 쉼팡(짐을 부려놓거나 앉아서 쉴 수 있는 납작한 받침대)은 고요하다.

60년전으로 돌아가본다. 조천중학원 학생이 고문치사했다. 유족의 뜻을 받아들여 조용히 장례를 치르기로 했지만 온 마을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한 사람의 죽음이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4월 3일 구엄, 한림, 애월, 삼양, 조천 등 섬 전역에 삐라가 뿌려졌다. 김시태(68)의 장편소설 '연북정'이 그린 4·3발발의 정황은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기진 중령의 시선을 좇는다.

"가들의 투쟁방식을 보면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라타캐서 가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 공산주의 숫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 맨키로 그리 많은 기 아입니다. 고작해야 1, 2백명 안팎에 불과할 깁니다. 아무리 미국 정부의 입장이 난처하게 됐다캐도, 내는 해방조국의 군인으로서 사상과 관계없이 뭣도 모르고 허덕이는 이땅의 민중을 무차별 사살할 수는 없습니다."('연북정')

김중령은 한라산으로 올라 '폭도'의 지도자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벌인다. 게릴라와 경찰 가릴 것 없이 쌍방이 즉각 전투를 중지할 것 등을 담았다. 합의 내용이 성사된다면 제주섬엔 평화가 올 것이다. '폭도라기보다는 뭣 모르고 산 속으로 달아났다가 살 길을 찾아내려온 가엾은 피난민'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끼는 김중령. 하지만 축배의 잔은 곧 깨진다.

소설은 평화회담의 결과를 부인하는 경찰의 표정에 이어 제주읍내와 가까운 오라리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우익청년들이 게릴라를 유인하고, 경찰이 달려들어 게릴라를 몰아내는 수순으로 꾸며진 '각본'에 김중령은 치를 떤다. 경찰은 오라리 방화사건이 '국제 공산주의자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일'이라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전히 공산주의 소굴이 된 제주도를 무력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중령은 외톨이가 됐다. 연대장이 바뀐다.

"봉화는 이날도 어김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며칠동안 평화가 찾아오는가 싶더니 그 꿈은 곧 사라지고, 이전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연북정')

조천의 젊은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준과 인숙도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한반도를 두 동강내는 5·10선거 반대 투쟁에 나섰다. 군경 합동작전은 한층 강경해진다. 어디서 몇명이 죽고, 붙들려갔다는 소식이 매일 이어졌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간다. 김이선씨(77·조천리)는 "조천 사람들은 똑똑한데나 부정한 것을 참지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면서 "그러니 4·3때 젊은이들이 마을에 남을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들은 선흘동백곶, 동굴로 피신하거나 토굴을 파서 숨었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설자리는 좁아졌다. 연북정에 올라 바라본 바다는 너른 품을 풀어헤친 모습이다. 현준도 그랬을지 모른다. 목포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빨갱이니, 폭도니 하는 손가락질을 잊을 수 있는 곳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포구뿐이었다.

투쟁전선에 가담했던 그의 동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인 숙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산으로 오르다 끝내 행방불명이 됐다. 지유철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장애를 안고 산다. 배덕교는 실성한 채 비석거리를 맴돈다. 부영진은 제주서 형사가 됐다. 현준의 형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박승휴는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노를 저어 어느 밤 일본으로 갔다.

전쟁이 터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려왔다는 소식을 들으며 민족분단을 사전에 막지못한 걸 한탄한다. 조천까지 피난민들이 몰려든다. 소설의 말미, 현준은 전장으로 향한다. '공산당'을 쳐부술 국군병사가 된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자년에 저 바다를 헤쳐간 젊은이들은 이어도를 찾았을까. 연북정에 올라 바라본 조천 앞바다.

['연북정'서 눈에 띄는 제주음식]우럭콩조림에 갈치꼴랭이

"우럭이란 놈은 오래 푹 끓여야 국물이 잘 우러날 것이었다. 마늘을 다져서 넣고, 콩을 몇 주먹 듬뿍 집어넣었다. 좀 짭조롬하게 간장을 몇 숟갈 낙낙히 부어넣었다."

현준은 휘파람을 불며 우럭콩조림을 만든다. 즉석에서 구워 먹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은 갈치꼴랭이(꼬리)도 인숙과 유철을 위해 깨끗이 손을 본다.

장편소설 '연북정'에는 제주 음식이 여럿 얼굴을 내민다. 소설속 주인공인 현준, 인숙, 김중령의 주변에 제주음식이 놓인다. 상외떡, 보리빵, 자리회, 옥돔미역국, 고등어 조림, 빙떡, 꿩 샤브샤브, 게우젓…. 여느 4·3소설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이름이었다.

'연북정'이 차마 눈뜨고 못보는 4·3 희생자의 사연에 무게를 실은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시대를 헤쳐나가는 이들을 그렸던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 밭에서 갓 건져올린 싱싱한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은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4·3무렵 제주섬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사는 형편에 따라 집집마다 음식이 달랐을 법하다. 김중령이 부하들과 꿩 샤브샤브를 먹고, 바닷일을 하는 현준이 자리회를 맛보듯이.

하지만 곤궁한 처지였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을게 마땅치 않았다. 조천리 김이선씨(77)는 "익힌 감저(고구마)에 좁쌀을 넣어 만든 감저조밥만 있어도 좋았다. 자리돔도 오래도록 먹기 위해 소금에 절인 후 콩을 넣어 짜게 지졌다. 옥돔미역국은 냄새도 못맡았다"고 했다.

밭을 팔아봐야 쌀 서너말 정도밖에 살 수 없는 때였다. 밭이 있어도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밥만 배불리 먹여주면 하루종일 남의 밭에서 검질(김)을 매주겠다는 말이 있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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