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희기자의 문화현장]'결혼'의 달콤함을 이대로

[진선희기자의 문화현장]'결혼'의 달콤함을 이대로
  • 입력 : 2008. 06.03(화)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제주오페라단 단막 오페라

안전장치 택한 아쉬움에도 상설 공연의 가능성 열어놔



남자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집을 빌리고, 양복을 빌렸다. 시간이 되면 빌린 물건들을 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단 채. 그래도 좋았다. 하얀 드레스에 분홍 리본을 단 여자가 남자의 집을 방문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청혼을 한다.

남자의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계를 목에 매단 하인이 나타나 시간이 되었다며 물건을 되돌려주라고 말한다. 넥타이를 풀어가고, 흰구두를 벗겨간다. 급기야 코끼리 팬티 차림으로 여자앞에 서는 남자. 실망감에 발길을 돌리는 여자에게 남자는 진심어린 고백을 한다. 당신을 빌리는 동안 아낌없이 사랑하겠다고, 그리고선 소중히 제자리로 되돌려놓겠다고.

희곡작가 이강백의 원작에 공석준이 곡을 붙인 '결혼'은 짧은 분량에 만만치 않은 메시지를 녹여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내 것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법, 시간이 되면 모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은 비단 남녀의 사랑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삶이 그러하다.

제주오페라단이 지난달 27일 문예회관에서 '결혼'과 파사티에리의 '델루조 아저씨' 두 편을 무대에 올렸다. 각각 40분쯤 이어진 단막 오페라였다.

'델루조 아저씨'는 오해가 오해를 낳으며 삐걱대다 결국은 참사랑을 발견하는 두 쌍의 남녀 이야기를 그렸다.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막힌 상황에 웃음이 터졌다. 오능희는 뻔뻔함이 묻어나는 클라라를, 문순배는 애타는 남자의 진심이 느껴지는 레온을 열연했다. 하지만 델루조 아저씨를 맡은 김훈석은 뻣뻣했고, 현선경은 가녀린 듯한 쉘리의 이미지를 제대로 뿜어내지 못했다.

'결혼'은 원작이 지닌 탄탄함 덕에 극의 몰입이 한결 쉬웠다. 강형권 김훈 배서영의 연기와 노래도 큰 흠이 없었다. 다만, 두 작품 모두 관객을 배려해 무대 왼쪽에 설치했다는 한글 자막이 거슬렸다. 노랫말보다 자막이 먼저 뜨는 게 숱했고, 맞춤법이 자주 틀렸다.

제주오페라단은 그동안 '라 트라비아타'(1998년), '카르멘'(2000년), '리골레토'(2001년)를 공연해온 민간 단체다. 7년만에 제주도문예진흥기금 5백만원을 지원받아 단막 오페라를 올린 데서 알 수 있듯, 오페라 제작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무대는 제주를 찾는 신혼 여행객을 위해 기획됐다. 공연장엔 대학생으로 보이는 관객이 다수였으나 넉넉치 않는 예산에서 '결혼'처럼 상설 공연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품을 빚어낸 것은 수확이다. 다른 오페라축제에서 검증받은 '안전한' 작품을 택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결혼'의 달콤함을 이어갈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해보인다. 때론 그것이 제주색을 품은 창작오페라를 만드는 힘이 된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2 개)
이         름 이   메   일
699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