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담만 간신히 버티고 있는 조천읍 와산리의 '잃어버린 마을'인 종남마을. 4·3때 불타버린 마을을 뒤로하고 떠났던 어느 집의 아낙이 대숲으로 둘러쳐진 돌담길을 훠이훠이 헤치고 돌아와 소설속 어머니처럼 도마칼을 벼를 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이승철기자sclee@hallailbo.co.kr
죽음 피해 고팡에 숨어들었다 아이잃은 어머니돼지 목따던 도마칼 몰래 품고 폐가에서 숫돌질"높은 동산에 올라 놀래나 부르당 와시민 좋으켜"
대숲이 설핏 흔들렸다. 안내자가 잡목을 낫으로 세게 치며 길을 냈다. 조천읍 와산리 '잃어버린 마을'인 종남마을. 돌담은 굳건했다. 저 올레에 누구의 어머니며, 아이들이 종종 걸음을 쳤겠지. 불에 타 집담만 간신히 남은 옛 초가의 형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어머니의 그림자가 스쳤다.
"고등어 몸통 같은 칼날이 숫돌물을 게워낼 때마다 억새풀 눕는 소리가 번져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차츰 닭의 날갯짓 소리에서 돼지숨통을 도막내는 음향으로 바뀌었다. 방금 대장간에서 벼려져나온 거나 다름없는 새 도마칼이었다. 시골 장터에서나 구할 수 있음직한 식칼이었다."('도마칼')
정부에서 낸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한 대목은 숱한 피해상황을 다룬다. '그 당시 후유증으로 50여년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음'이라고 요약해놓은 어느 사례앞에 눈길이 멈춘다. 한줄의 문장은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차라리 몸에 새겨진 상처라면 달게 받을 수 있을 터, 머릿속에 똬리 튼 폭력의 기억은 영혼을 앗아갔다.
푹 꺼진 지붕아래 칼을 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촛점없는 눈을 한 채 도마칼을 추켜드는 여인. 소설집 '대통령의 손수건'에 실린 고시홍씨(60)의 중편 '도마칼'(1984)은 폐가로 찾아든 어머니의 해괴한 행각으로 시작된다.
▲'도마칼'의 배경이 된 한라산 기슭의 기도원 지붕에 구원의 십자가가 달려있다.
"저 사름은 누게고? 작은 삼촌이 구정물 같은 눈물을 훔쳐대며 제주공항에 나타나던 날만해도 어머니는 당신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고삐 풀린 야생마가 되리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신 스스로 갇혀 있으려는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어머니의 밀폐된 공간이 검은 옻칠을 해놓은 관으로 둔갑되지 않을까 걱정됐다."('도마칼')
4·3때 행방불명돼 헛묘까지 만든 작은 삼촌이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단원이 되어 나타난다. 작은 삼촌은 다름아닌 어머니의 남편. 아버지는 성담 밖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작은 삼촌은 종적을 감춘다. 젖먹이와 함께 고팡에 숨어있던 숙모는 그만 아이를 잃고, 조카를 양아들로 들인다. 밤이 되면 지상동굴로 변했던 그 때, 아이들은 매일매일 죽음을 보고 자란다. 생포된 산사람을 웅덩d속으로 밀어내는 일이 마을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그것들은 거적송장이 되어 나갔다. 아이들은 '빛을 앗아간 산사람들을 좀 더 천천히 죽여주었으면'했다.
도마칼을 갈던 어머니는 "내 가슴에 불이나 꺼도라'고 한숨쉬듯 내뱉는다. "높은, 높은 헌 동산에 올라가 놀래나 부르당 와시민 좋기여"라고도 한다. 정신을 놓은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던 양아들은 한라산 기슭 기도원에 그를 맡긴다. 소설의 모델이 된 기도원은 숲속 정원 같았다. 자그만 십자가 뒤로 한낮의 하늘이 눈부셨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불덩이 같은 가슴을 풀어헤쳤을까. '도마칼을 노리개처럼 차앉아 사는' 위험한 어른이었던 어머니는 도사견처럼 쇠사슬로 묶인 채 숙소건물 기둥에 매달려 지낸다.
"어머니는 내가 다가선 후에도, 당신 발목에 채워져있는 쇠사슬을 돌부리위에 걸쳐놓고 앉아 돌멩이로 내려찍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열병처럼 전신에 퍼지는 분노를 억누르며 어머니 발목에 채워져있는 마디굵은 쇠사슬을 풀어냈다."('도마칼')
작가의 상상력이 깁고 보태진 것이긴 하지만 소설은 실화에 기댔다. 4·3증언채록을 했던 작가는 실제 이보다 더한 사연이 많다고 했다. 남편을 찾아 산에 오른 여인을 막아서고 업고 있던 어린애를 빼앗가 그 앞에서 배구처럼 던지고 받고 했던('계명의 도시') 일도 있다.
말을 아껴온 체험세대 누군가는 도마칼을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력하다. 소설속 어머니는 도마칼을 쥐고 있었으나 누구도 해치지 못했다. 돼지목을 따던 도마칼처럼 어딘가를 겨눈 칼날이겠지만 깨진 유리에 제 몸만 피투성이가 된다. 4·3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앞에 놓인 인간의 삶은 어땠나. 소설은 4·3이야기를 넘어 그것을 묻는다.
"4·3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2연대 소속 군인이었던 아버지…할머닌 최면처럼 4·3 이야기를
고시홍씨는 두 권의 소설집을 냈다. '대통령의 손수건'(1987)과 '계명의 도시'(1991)다. 4·3을 다룬 소설이 많다. '도마칼'말고도 '해야 솟아라', '저승문', '유령들의 친목회', '계명의 도시', '자서전 고쳐쓰기' 등이 있다.
작가는 4·3이 발발하던 해인 1948년 태어났다. 가족들은 갓난애를 보며 "어지러운 시국에 왜 나왔느냐"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서야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
아버지는 4·3 진압작전을 벌인 제2연대 소속 군인이었다. 6·25때 전사한 것으로 짐작할 뿐,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은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앨범. 4·3진상조사보고서 책머리에 실린 몇장의 사진은 바로 그 앨범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개가하고 형제도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란 작가는 스스로 4·3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어린 그에게 4·3때 이야기를 반복해 들려줬다. 그것은 최면처럼 그의 기억에 퍼졌다.
4·3의 갖은 사연이 세상 밖으로 터져나오기 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 10여년간 작가는 4·3 문헌자료를 모으는 일에 몰입했다. 그때만 해도 자료를 구하는데 제약이 많아 쉬쉬하며 수집했다. 문헌기록을 뒤져 4·3당시의 인명피해를 발표한 적이 있고, 오라리 행원 토평 서호·호근 대포 마을에 대한 4·3자료로 채록했다. 그뿐이 아니다. 어부·해녀 생애담 채록때도 4·3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발로 뛰며 현장에서 건져올린 자료는 소설가인 그에겐 큰 자산이다.
소설 작업을 떠나, 4·3증언을 공개했을 때 유족들이 보인 반응은 그에게 상처가 된 듯 했다. 고향의 마을지에 담긴 4·3자료 때문에 "왜 이제와서 그 일을 들추느냐"며 유족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던 일도 있다. 정부 차원의 4·3진상조사가 이루어지는 시기였지만 그랬다.
이즈막에 거세진 4·3에 대한 색깔공세를 걱정스럽게 지켜본다는 그는 "4·3진상규명이 진행중인 현실에서 제주의 작가라면 문학활동을 통해 그 진실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