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시계 방향으로 ①지미봉 중턱에서 찾아낸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구축한 갱도진지 입구 ②취재팀이 갱도진지 내부를 조사하는 모습 ③갱도진지 내부에서 보이는 우도 전경 ④송이층을 뚫고 만들어진 갱도진지 내부./이승철기자 sclee@hallailbo.co.kr
오름 중턱엔 갱도… 포구에는 특공시설일본군 주민 강제 동원 갱도진지 만들어해안가에 특공정 배치·유도로시설 구축
'땅끝', 즉 제주도 동쪽 끝 해안에 솟아있는 지미봉(地尾峰)이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소재 지미봉(표고 165.3m)은 제주도의 동쪽 끝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 그래서 이 일대는 땅끝으로 불렸었고, 또한 이 말은 지미봉을 일컫는 뜻이기도 했다. 제주섬의 머리에 해당한다는 한경면 두모리와 대칭을 이룬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 진지를 표시한 군사지도인 '제58군배비개견도 제주도'를 보면 제주 동부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위장진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23곳 가운데 절반 정도인 11곳이 위장진지다. 위장진지(僞裝陣地)는 적, 즉 미군 등 연합군의 공격을 분산하거나 교란시킬 목적으로 만든 진지에 해당한다. 지미봉에도 갱도진지 3~4곳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일본군 진지의 하나로 이용됐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마을 주민 채정옥씨(1926년생·호적상 1931년생)는 지미봉에서 갱도진지 2곳을 직접 굴착했다. 갱도는 마을주민들이 강제 동원돼 일본군들의 감시 아래 구축됐다. 취재팀은 증언 등을 토대로 지미봉 탐사에 나섰다.
취재 결과 갱도는 마을 공동묘지 인근 소나무 숲속에 숨겨져 있다. 오름 4부 능선쯤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U자형으로 길이는 20m 정도인 소규모 갱도진지다. 송이층을 뚫은 갱도는 입구가 일부 무너진 것 이외에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입구는 동쪽 방향으로 나 있다. 입구 정면으로는 우도와 성산 일출봉이 잡힐 듯이 가까이 있다.
지미봉에는 또하나의 갱도진지가 구축됐으나 함몰된데다 수풀이 무성한 상태여서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 일대에는 어떤 일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을까. 태평양전쟁 말기 구좌읍 하도 일대에는 일본군 독립혼성제108여단 예하 647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채씨도 "세화·하도리 일원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지미봉 갱도 구축현장에 파견나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 육군이 갱도를 굴착했지만 종달리 포구인 두문포에는 일본 해군 특공부대가 주둔했었다. 병력은 1개 분대 정도로 성산 일출봉에서 두문포로 파견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 채씨의 증언이다. 당시 일출봉은 일본 해군 진양(震洋) 특별공격대 기지였다. 실제 이곳 해안가에는 많은 갱도진지들이 지금도 남아있고, 제45진양대 소속 병력 1백80여명이 주둔했던 것으로 문헌에는 나타난다. 두문포 백사장에는 시멘트로 된 유도로 시설과 보트가 있었다고 채씨는 말했다.
이러한 점에 비춰 볼 때 지미봉 갱도는 연합군 함정의 출현 등 해안 상황을 관측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미봉 갱도 앞에서는 일출봉과 우도가 빤히 보일 정도로 전망이 트였다. 또한 지미봉 기슭 두문포 해안은 일본 해군 자살특공기지로 이용됐다. 두문포 해안은 진양특공정을 발진시키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지녔다.
제주도 전체를 전쟁기지화 했던 일제는 동쪽 끝 지미봉이라고 비켜갈리 없었다. 지미봉 역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본토사수를 위한 전쟁기지로 이용됐다. 그 과정에 마을 주민들이 강제 동원돼 노동에 시달렸다. 일본군의 전쟁야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표성준 이승철기자
[현장 인터뷰] 구좌읍 종달리 채정옥씨
"갱도구축·공출에 엄청 시달렸죠"
"지미봉 갱도는 종달 주민들이 직접 팠습니다. 곡괭이 등을 이용해서 팠죠. 그때 일본군들은 세화리에서 왔습니다. 세화리에는 2백~3백명 정도 주둔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2~3명이 출퇴근 하면서 지미봉 갱도 파는 현장에 와서는 공사를 지시하고 감독했죠."
채정옥씨(82·구좌읍 종달리·사진)는 "어느 날 일본군들이 나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주민 30~40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증언에 따르면 주민 동원은 일본군들이 면사무소를 통해 지시하면 구장들이 통보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주민들은 3~4개조로 편성돼 작업현장에 투입됐는데, 채씨는 일종의 분대장 역할을 했다. 주민들이 동원된 시기는 1945년 3월쯤으로 기간은 15일 정도 됐다. 당시 일본군들은 작업도구만 내줬고, 먹을거리는 집에서 준비해야 했다.
채씨는 또 이 일대 일본군 주둔상황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당시 하도심상소학교 다닐 때 세화리로 신사참배를 다녔었습니다. 그때 보면 현재 해녀박물관 근처에 일본군들이 천막치고 주둔했었습니다. 또한 기마대가 있었고 말이 많았었는데, 해방 후에 구루마가 민간에 유출돼 이용됐습니다."
특히 종달리 두문포 해안에도 일본 해군이 주둔했었고, 보트와 유도로 시설이 만들어졌었다고 증언해 눈길을 끌었다.
"갱도 굴착이 끝난 뒤에 일입니다. 해방되기 2~3개월 전인 것 같아요. 그때 일본 해군 1개 분대 정도가 성산포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종달리 두문포 해안 백사장에 보트를 끌어내리기 좋게 만든 시멘트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그 길이는 10여m 정도로 경사지게 만들었죠. 일종의 유도로 시설인데, 보트 4~5척 정도는 육상에 놔뒀습니다."
채씨는 또한 당시 절간고구마는 한집에 몇 푸대(마대)식으로 할당됐고 돼지·소 공출도 벌어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돼지는 목에다 빨간 줄을 매달아 몇 월 며칠 끌고 가겠다는 표시를 했다는 것.
채씨는 "처음에는 일본군이 쉽게 패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마을 주민 5~6명도 북해도 탄광으로 끌려가는 등 엄청 고생했다"고 말했다.
/이윤형기자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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