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가람 '수일군, 순애양'… 지역연극 활성화 내건 공연
잘만든 창작극 받침돌 되길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칼을 찬 일본 순사가 객석을 어슬렁거리고, 그 틈을 비집고 엿장수가 엿을 사라 외쳤다.
문득, 이곳이 어딘가 싶었다. '쿨한 사랑'이 대세인 때에 고색창연한 이수일과 심순애를 불러내려니 그랬던 것일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하려는 그들은 공연 시작전부터 관객들을 과거로 향하는 '타임머신'에 태웠다.
지난 19일 저녁 한라아트홀 대극장. 극단 가람이 '퓨전신파악극'으로 이름붙인 '수일군, 순애양'을 110분간 무대에 올렸다. 창단 33주년을 맞은 가람이 내놓은 이 작품은 여느 정기공연과 달랐다. '도내 극단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야심작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아온 제주 연극에 힘을 불어넣겠다며 기획됐다.
'수일군, 순애양' 이야길 처음 들은 것은 지난 6월 인천 전국연극제 자리에서였다. 극단 가람의 몇몇 단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주연극은 안된다'는 생각을 깨고 싶다고. 공연장으로 기껍게 걸어들어오는 관객들을 만들고 싶다고.
극단 가람은 이 가을, 그 약속을 지켰다. 9월 18~21일 4일간 모두 6회에 걸쳐 '수일군, 순애양'을 공연했다. 극단측이 밝힌 회당 관객수는 4백명 안팎. 8백여석 규모의 공연장인 점을 감안하면 절반쯤 객석이 찼다.
그럼에도 가람은 여러 시도를 벌였다. 배우가 귀해 서너명이 출연하는 작품이 많은 게 제주 연극의 현실이라면 이번 공연엔 단역을 포함해 30명 가까운 인물이 등장했다. 모던앙상블의 라이브연주로 노랫말을 바꾼 귀익은 가요가 불려졌다. 춤 공연과 엿장수를 등장시켜 막간의 지루함을 덜었다. "그래, 한번 무대위에서 실컷 놀아보자"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문제점도 드러났다. 관객의 손에 쥐어진 작은 책자의 내용과 달리 변사로 캐스팅된 출연자가 다른 얼굴로 바뀌어 나오거나 김중배의 '애인'으로 그려진 월선이가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 극에 양념을 치는 역할을 맡은 변사의 등퇴장이 매끄럽지 못할 경우 자칫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우려도 있었다.
이광후 극단 가람 대표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일회성 공연으로 끝낼 게 아니라 부족한 점을 다듬으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어느 기획사에서 '수일군, 순애양'을 눈여겨본 사례도 있다고 했다.
지금껏 도내 무대극 분야에서 '잘 만든' 작품 하나 갖지 못한 게 현실이다. 배우, 연출, 스태프 등 끈질기게 무대에서 살아남은 인력이 드문 것도 원인이지만 그런 시도도 귀했다. 가람은 제주도무대공연제작지원 사업비에다 그만한 비용을 다시 더해 이번 작품을 만들었다. '수일군, 순애양'이 제주색을 품은 창작극까지 끌어낼 수 있는 받침돌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