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15)-제4부 타케의 제주식물 재발견(상)

[제주 세계유산을 빛낸 사람들](15)-제4부 타케의 제주식물 재발견(상)
20세기초 유럽에 제주식물 전파한 신부이자 식물학자
  • 입력 : 2009. 09.16(수) 00:00
  • 강시영 기자 sykang@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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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이자 제주식물에 관심을 보였던 프랑스 출신의 타케 신부는 20세기초 제주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는 동안 집중적으로 제주도의 식물을 채집한다. 그가 채집한 표본은 유럽 각국의 대학이나 박물관에 매각되거나 기증되면서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사진은 포교활동 당시의 타케신부(맨 오른쪽) /사진=한라일보 DB

성직자이면서 식물학에도 해박… 동료 신부와 채집
세계 각국 유명 표본관에 제주 특산식물 표본 존재
전문가 "서양에 제주식물 존재·가치 알리는 계기"


제주의 자연유산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세가지 보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식물이 외부세계에 알려진 것도 이 때 부터이며 제주식물에 대해 근대적 의미의 연구가 시작됐다.

동경제국대학에 재학중이던 약관 20세의 이치카와 상키(市河三喜, 1886∼1970)와 미국의 동물학자 앤더슨 일행은 1905년 8월 9일 제주에 도착한 뒤 9월 27일까지 40여일간 제주에서 천막생활을 하면서 동·식물을 채집했는데, 이때 제주식물이 외부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이치카와 일행의 제주체류 기간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고, 한국에 이른바 을사늑약을 강요하던 해였다. 굴욕적인 을사늑약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자주권을 상실하고 일본으로부터 원치않는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치카와 일행이 제주를 다녀간 한 해 뒤인 1906년에는 서홍리 성당 프랑스 신부 타케(사진)가 제주의 식물에 큰 관심을 보였다. 타케신부는 수 만점의 표본을 제작하여 유럽의 대학이나 박물관 등에 보냈다. 일본인 식물분류 학자인 나카이는 1913년 제주도에서 약 1개월간의 식물조사와 타케신부가 채집한 식물표본을 감정한 후, 1914년 제주도의 식물상을 정리하여 1433 분류군을 발표했다. 1921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윌슨이 구상나무를 신종으로 발표하며 지금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식물로 평가받고 있다.

# 식물의 보고, 세계에 알리다

몇해전 한라산에서 채집된 제주특산 식물들이 100년만에 공개됐다. 1900년대초 한라산에서 채집돼 서양에 보내졌던 제주 특산식물의 실물 표본사진을 본보가 입수한 것이다. 이 표본은 대전대학교 김주환 교수(생물학과)가 영국 왕립식물원과 대영박물관에서 지난 1999년부터 4년여간 연구원과 교환교수로 활동하는 기간에 직접 찍은 것으로 이 중에는 한라산 식물도 수십여종에 이른다. 표본은 1900년대초 서귀포 서홍성당에서 포교활동을 했던 프랑스 타케신부, 그리고 당시 일본 아오모리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타케와 함께 한라산 식물을 조사·채집했던 프랑스 포리신부가 채집해 유럽에 보냈던 것으로 현재까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

본보가 김 교수로부터 입수한 표본사진은 한라꽃창포와 한라개승마, 좀갈매나무 등 세 종으로 모두 특산식물이다.

이 표본들은 190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채집된 것들이다. 이들 표본은 타케와 포리신부를 통해 프랑스의 레빌레(Leveille)박사에게 보내졌다. 표본에는 채집자와 채집일 및 장소, 명명자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제주도가 식물의 보고임을 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실물표본들이다.

# 제주식물 서양에 어떻게 건너갔나

타케신부는 식물학자는 아니었지만, 식물표본에 의한 수익금이 성당의 포교기금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아오모리에는 역시 프랑스 출신의 포리신부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이면서 식물학에도 해박했던 그는 수차례 한국으로 건너와 식물을 채집하고 조사했는데 타케와 함께 한라산에서 집중적으로 식물을 채집했다. 포리의 채집품은 타케의 것과 함께 유럽과 미국 등에 보내어졌다.

이들 표본들은 영국의 Hooker, Bennet, 독일의 Schlechter, Schneider, Winkler, 불란서의 Leveille, Vaniot 등 여러 식물분류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 발표되었으며 신종으로 잇따라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실제 타케가 보내 명명된 식물로는 섬잔대, 한라부추, 왕밀사초, 섬잔고사리, 갯취, 좀갈매나무, 제주가시나무, 한라꿩의다리, 뽕잎피나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로써 서양에 제주식물의 존재와 가치가 비로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립산림과학원 김찬수 박사는 타케를 이렇게 평가한다. "식물채집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시로서는 모두가 특산식물들로 기록됐던 다수의 새로운 종들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식물학을 전공한 학자의 수준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케 신부가 식물채집을 하게 된 동기가 단지 포교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유럽에서는 신부의 신분으로 과학과 예술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가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의 경우도 신부였다."

현재 타케 신부가 채집한 표본은 세계의 유명한 표본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의 동경대학과 국립과학관에도 있으나 한국에는 남아 있지 않다. 사후 그가 채집한 많은 표본과 식물분류학 자료들이 대구 천주교 주교관내 도서실에 보존되어 오다가 1964년 12월 화재로 전부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타케의 서한]
서귀포서 신부 재임중 행적 '생생'
식물 채집·표본 서양 진출사 기록


▲타케신부가 서귀포 재임중 주교에게 보낸 육필 서한. /사진=한라일보 DB

제주의 식물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것은 제주 선교역사와 때를 같이한다. 그 주인공이 바로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다. 그는 엄택기(嚴宅基)라는 한국명도 갖고 있어 '엄신부' '엄 에밀리오 신부'로 불렸다. 타케는 1873년 10월 30일 벨기에 국경 가까운 프랑스 루르드 주에서 태어나 1892년 9월 23일부터 1897년 9월 27일까지 파리 외방전교회 졸업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신부로서 첫 임지인 한국으로 부임하기 위해 파리를 출발한 것은 신부로 임명된 당시인 24세 때로서 1897년 10월 28일이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는 1898년 1월 5일에 도착했다.

타케가 제주에 부임한 것은 광무5년(1901) 제주 전역에 걸쳐 천주교도와 도민이 무력 충돌한 '이재수란'(신축교안)이 발생한 이듬해인 1902년 4월. 타케는 1902년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하논)본당에 잠시 거주한 후 그해 6∼7월 사이에 홍로(烘爐)로 옮긴다. 홍로는 지금의 서귀포시 서홍동 일대다. 그는 1915년까지 13년간 대부분의 기간을 이 곳(복자수도원 면형의 집)에서 지내며 선교 활동과 함께 왕성하게 식물 채집에 나선다. 타케가 머물던 홍로 본당이 선교 역사 뿐만 아니라 제주 근대식물 연구에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긴 공간으로 회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케는 이후 1915년까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집중적으로 제주도의 식물을 채집한다. 그가 채집한 표본은 유럽 각국의 대학이나 박물관에 매각되거나 기증되면서 유럽의 학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세계 식물사에 제주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표본을 보내 얻은 수익금으로 포교사업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비박사 석주명은 한 기고문에서 "타케가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濟州島 식물채집조사가로서 오히려 유명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타케의 서귀포 재임중 행적은 당시 그가 뮈텔주교에게 띄운 여러 통의 서한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뮈텔주교는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다. 이 서한은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65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타케가 작성한 것으로는 모두 18통이 전해지고 있다. 타케의 서한은 당시 제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타케의 서한은 '한논'에서 작성된 것이 1통, 제주에서 작성된 것이 6통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로에서 작성된 것이다.

타케와 당시 신부들의 서한은 제주도의 복음 전파 과정과 각 본당들의 정착·변모과정 등 제주선교사를 규명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타케의 서한에는 식물채집과 그 표본을 서구에 보내는 과정, 식물을 팔아 선교비용으로 충당하는 내용 등 제주도의 식물이 서양으로 진출하는 역사가 생생히 기록돼 있어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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