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북촌 포구의 등명대는 1915년 12월 축조된 등대로 일각에서는 이를 제주도 최초의 민간등대로 꼽는다. 상단에 '등명대'란 글자가 박힌 빗돌이 세워져 있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민간에서 어부 밤바다 밝히던 옛 등대 흔적 곳곳기록으로 남은 '등명대' 도두동 빗돌에서도 확인
추적추적 비날씨속에 일찌감치 땅거미가 졌다.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범섬의 윤곽이 희미하게 잡힐 뿐이다. 얼마전 찾은 서귀포시 강정 포구. 근래 해안도로가 뚫리면서 지형이 바뀌었다. 범섬을 눈앞에 둔 강정어촌계 사무실 옆에 있는 '돌무더기'도 그중 하나다. 1997년에 출간된 '제주의 도대불'(이덕희)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밑둥마저 스러졌다. 갯돌 예닐곱개가 옛 모습을 간신히 붙잡게 만든다.
그렇다. 그것은 어느 시절 밤바다를 헤치며 집으로 돌아오던 어부의 뱃길을 비추던 불빛을 오래도록 품은 적이 있다. 등불, 등댓불, 불, 도대불, 등명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옛 등대였다.
▲북촌 포구 등명대
▶'어즉위' 일제 치하와 관련 추정
강정에선 등명대로 불렀다고 했다. 강정에서 태어나 줄곧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윤경노씨(90)의 증언이다. 어릴적부터 마을에서 등명대로 칭했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생겨났다. 등을 밝히는 대를 뜻하는 등명대(燈明臺)란 한자어다.
주지하듯, 등명대는 강정에서만 불리던 이름은 아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포구에 세워진 옛 등대는 등명대란 비문이 또렷이 남아있다. 비문에 따르면 1915년 12월 축조된 등대다.
2008년 유적지 표석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제주시 지역 옛 등대를 조사하고 빗돌을 설치한 제주문화원에 따르면 북촌 등명대는 기록상 민간에서 만든 제주 최초의 옛 등대다. 등탑 상단에 축조 연대를 헤아릴 수 있는 비가 있다. 높이 57㎝, 너비 27㎝, 두께 10~12㎝에 이르는데 비의 앞면에 '御卽位(記念)燈明臺 大正四年十二月建'이란 글자가 음각됐다. 대정 4년은 1915년을 이른다. '기념'으로 짐작되는 두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4·3 당시 총탄 자국으로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주문화원은 "'어즉위'는 임금의 즉위를 이르는 일본어"라면서 "일제 치하 관에서 마을에 등대를 만들라고 종용했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마을에서 등탑의 설치를 관에 건의해 만들고 그 재원조달의 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추정했다.
북촌 등명대는 기념비를 통해 축조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문에 쓰여진 축조 시기와 관련해선 1914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선박령과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조선선박령은 식민지 통치의 중요수단중 하나인 선박 행정을 단일화하기 위해 행해졌다.
▲제주시 도두동 주민센터 앞마당엔 '등명대'란 글자가 남아있는 비문이 나뒹굴고 있다.
▲'제주의 도대불'에 실린 강정마을 등명대 모습. 지금은 밑둥마저 사라졌다.
▶축조 시기 어느곳이 앞선 것일까
등명대란 이름은 제주시 동부 지역인 북촌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서부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시 도두동 주민센터 앞마당에 무심한 돌덩이처럼 놓여진 비문이 그 점을 증거한다. 2/3쯤 잘려나간 것으로 보이는 비문엔 다행히 '등명대'란 글자가 살아있다. 가까스로 읽을 수 있는 문구는 '(記)念燈明臺 (年 또는 十)二月建設'. 괄호안의 글자는 비문 끄트머리에 남아있는 한자 획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이것대로라면 북촌리와 비슷한 시기에 쌓아놓은 등명대다. 그보다 앞선 것일 수도 있다.
이 빗돌은 어디서 온 것일까. 마을에 있던 옛 등대를 '등댓불'로 칭한 김희천씨(82·제주시 도두1동)는 "도두봉 정상에 등댓불이 있었다. 그러다 4·3 당시에 불을 피울 사람이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해방후에는 포구 입구에 등댓불을 설치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김씨는 도두봉이나 포구에 있던 옛 등대에 북촌리처럼 축조 시기 등을 새겨넣은 빗돌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비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이 마을에 오랫동안 터잡고 살아온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등명대란 말은 처음 듣는다. 어디에 그런 비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옛 등대 조사에 나섰던 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은 "도두동 옛 등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오래물' 부근으로 옮겨졌다가 주민센터 등으로 전전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등명대는 그렇듯 잊혀졌지만 그것은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남아 바닷길을 비췄다. 어원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도대불을 즐겨 쓰는 언중들이 많은 것에 비해 기록으로 전해지는 명칭은 등명대란 점도 흥미롭다. 이들 옛 등대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짠내음 맡으며 생을 일궈야 했던 제주에선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밤바다를 밝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귀포시 강정마을 윤경노씨 "등명대인줄 알리 없으니 사라져도 아쉬움 없을 것"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등명대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아쉬움도 없을 겁니다. "
강정리장, 강정동 노인회장 등을 지낸 윤경노씨(90)는 서귀포시 강정마을 '등명대' 흔적이 갯돌 몇 개로 남은 걸 보고 그렇게 말했다. 강정마을 등명대는 '제주의 도대불'에 실린 사진 말고도 강정마을회에서 내놓은 '강정향토지'(1996)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강정마을 포구 머리에 있었던 등대의 이름'으로 '환해장성의 마지막에 등명대의 철재 잔해가 보이고 있다'고.
그는 향토지에 실린 몇 줄의 기록을 뛰어넘어 등명대에 얽힌 기억을 상세히 풀어냈다. 도두나 북촌처럼 비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등명대로 불러왔다고 한다. 일찍이 '향토강정'이란 단행본을 통해 강정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꼼꼼히 담아냈던 그다.
"강정포구에서 출항한 어부들이 해상사고를 많이 당하자 '세상과 이별하는 포구'란 뜻의 강정포구 별칭인 '세별포(世別浦)'를 영주포로 고친 적이 있어요. 1917년과 1920년에 강정포구를 나선 어선이 조난된 후 더 이상의 해상 사고는 없어야 한다며 마을 사람들이 영주포구 위에 돌탑을 쌓고 그 위에 등을 달아 위치를 알려주는 시설을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등명대입니다."
영주포로 작명한 이는 바로 윤씨의 큰할아버지(윤영환)였다고 했다. 그는 당시 등명대에 석유로 불을 켜는 역할을 맡던 마을 주민의 이름도 언급하며 "어부들이 불을 켜는 사람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종종 바닷고기를 반찬거리로 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강정동 등명대는 차츰 그 기능을 잃어갔고 1990년에 현대식 등대가 설치되면서 그 자리를 온전히 빼앗겼다. 해안을 가르는 도로는 가물가물한 기억마저 앗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