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식생과 숯가마터, 갱도진지 등 자연과 역사문화자원이 풍성한 이승악 숲길. 거대한 화산탄에 뿌리내린 나무 등 독특한 경관가치를 이곳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사진=표성준기자
이승악·신례천변 조성 생태탐방로 경관가치 높고식생·숯가마터·갱도진지 등 역사문화자원도 다양
160여만㎡(50여만평)에 달하는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1리 서성로변 마을공동목장. 서성로 북쪽으로 목장길을 따라 한켠에는 이승악까지 붉은 송이가 깔린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탐방로를 걷는데 목장 안의 소 한마리가 어떻게 우리를 빠져나왔는지 저만치 앞서 걷는다. 소에게 탐방로를 내주고 소가 평소 다녔을 길을 걸어 그 뒤를 따르니 피아의 구별도 없거니와, '호접지몽'을 연상시키는 장면에 마음까지 무장해제된다. 정면에 이승악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왼쪽 너머로 성판악과 사라악, 한라산 정상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트레킹코스 안내도와 오름정보를 알려주는 안내표지판, 눈사람처럼 쌓아올린 화산탄 두 개가 이승악 입구에서 반긴다. 앞서 다녀간 탐방객들이 남겨놓은 천연 지팡이 5개가 화산탄에 기대서 있거나 누워 있다. 그 맘 씀씀이에 벌써부터 흐뭇해진다. 일제시대 때 사유지와 국유지를 구분하기 위해 쌓았다는 돌담(구분담) 사이로 숲길이 시작된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나무에 이름표가 붙어 있는데 사계절 푸른 붉가시나무가 먼저 눈에 띈다. 이어 만나게 되는 비목과 쪽동백, 산딸나무, 새비나무, 서어나무, 예덕나무, 새덕이, 구실잣밤나무와 일일이 눈도장을 찍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만 조림지가 아닌 생짜 숲이기에 놓칠 수 없다. 거기에다 이름마저 생소한 말오줌때와 덜꿩나무, 까마귀베개, 가막살나무, 합다리나무, 섬게벚나무쯤에 이르면 조물주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300여종의 식물이 살아가는 이승악이다.
이승악이 남다른 건 이 때문만은 아니다. 숲길에는 일제시대 때 군수품으로 조달하기 위해 숯을 구웠던 4개의 숯가마터가 남아 있다. 울창한 숲과 신례천이 있어 숯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 나무를 베어 구운 뒤 신례천 물을 끌어다 냉각시켜 질 좋은 백탄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무암을 이용해 원형으로 쌓아올린 원통형의 숯가마 바닥에는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주인들이 사용했던 숯이 묻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를 점령한 일본군이 파놓은 갱도진지도 빼놓을 수 없다. 오직 자연만이 살아 숨쉬는 고즈넉한 이곳에 스며 있는 사람의 흔적과 전쟁의 생채기.
▲이승악숯가마터
오름 북쪽에는 지름이 10m 이상 되는 거대한 화산탄이 군집해 경관을 이룬다. 덩치가 커서 화산 폭발 당시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분화구 가까운 곳에 떨어진 것들이다. 특이하게도 이 바위들은 사귐성 좋게 나무들과 한데 엉켜 있다. 바위를 땅삼아 뿌리내린 나무와 나무에 제 살을 허용한 바위는 그 자체로 어울리며 살아가라는 경구를 던져준다. 다른 오름과 달리 이같은 환경이 잘 보존된 이승악은 경관가치가 높고도 독특해 트레킹코스로 안성맞춤이다.
3㎞에 달하는 숲길을 따라 이승악 둘레를 한 바퀴 둘러보는 데 한시간 10분이 소요됐다. 곳곳에 평상이 놓여 있어 한숨 쉬어갈 수도 있지만 서 있어도 휴식이 가능한 이승악. 저승과 이승의 경계나 되는 것처럼 신비로운 볼거리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승악 체험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비유해본다. 휴대전화조차 저절로 수면모드에 들어가는 이승악에서 오감 만족!
▶ 주변 볼거리
신례1리에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 제주도내 생물자원 연구를 수행 중인 생물종다양성연구소가 들어섰으며, 흑돼지쇼로 유명한 휴애리도 있다. 마을회에서 운영중인 토종닭농장에서는 토종닭을 판매하고 있으며, 마을 안에는 지방문화재인 양금석씨 초가도 볼만하다. 이승악 북쪽의 표고버섯재배지와 함께 숲이 울창해 해를 가린다고 해서 주민들이 '해그므니'라 부르는 자연림과 삼나무숲도 산림생태욕장으로 제격이다. 이승악 숲길은 사려니 숲길로 이어진다.
▶ 찾아가는 길
이승악이 자리잡고 있는 서성로는 대중교통편이 없어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제주시에서는 5·16도로→서성로→이승악 입구(수망리와 신례리 방향 구분 교통표지판)까지 40분 정도 소요된다. 서귀포시에서는 5·16도로→서성로→이승악 입구까지 20분이면 다다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목장길을 따라 조성된 탐방로를 걸어 이승악 입구에 도착하면 안내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양문현 신례1리생태마을추진위원장 "자연·역사 어우러져 에코투어리즘에 최고"
양문현 신례1리 자연생태우수마을 추진위원장은 마을에 생태로와 트레킹코스를 조성하기 위해 재작년에 1년 동안 숲 속을 헤매고 다녔다. 한국산악회 출신으로 탐사에 능한 그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놓치기 쉬운 곳을 찾아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승악 트레킹코스와 신례천 생태로를 탄생시켰다.
"이승악과 신례천은 다른 곳과 달리 자연과 역사·문화자원이 집중된 지역이어서 에코투어리즘에 안성맞춤입니다. 다양한 식생은 물론 숯가마터와 갱도진지, 표고버섯재배지와 건조장, 인근 수악에는 4·3주둔지 등 독특한 역사문화자원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장점만을 찾아내 트레킹코스와 생태탐방로를 조성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을에 유치한 제주생물종다양성연구소와 연계해 체험거리도 준비했다. 지난 2008년 연구소 직원이 멸종위기에 처한 물장군을 마을에서 포획했는데 증식에 성공한 것. 마을에서는 마을만들기 사업 예산을 투입해 탐방코스에 곤충체험관을 만들었으며, 5월 이전에 물장군과 장수하늘소 등 희귀곤충을 입식한 뒤 공개할 예정이다.
"마을주민과 관광객, 기업이 윈윈할 수 있는 방안으로 부지를 제공해 자연생태학습관을 만들고, 기업도 유치할 계획입니다." 국내 모 기업이 신례1리의 감귤과 자연조건을 활용한 사업에 관심을 보여 조만간 가시화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