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 구엄리에서는 오는 8월쯤 복원된 돌염전에서 소금 생산을 시도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자료에 따르면 구엄리 염전은 면적에 비해 소금 생산량이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어촌체험마을 연계 재현한 염전 내년부터 체험 행사 계획
햇볕이 빚어내는 소금 생산방식에 남다른 이야기 입혀야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 알갱이가 눈에 들어왔다. 요며칠 따거운 햇살이 바닷 바위에 내려앉았던 터였다. 밀려들고 빠져나가길 반복했던 짜디짠 바닷물은 어느새 검은 돌 위에 소금을 뿌려놓았다.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의 '돌염전'. 이노공 구엄리 어촌계장은 자연스레 생겨난 소금 알갱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을에서는 10년전쯤 돌염전을 복원해놓고 체험 사업을 추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 제주시의 어촌체험마을 사업 지원을 받아 지난 연말 돌염전을 새롭게 만들었다.
▶개인 소유로 매매했던 증거
'제주올레코스'가 경유하는 포구에 세워진 빗돌에 새겨놓은 '돌염전의 유래'를 보자.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소금빌레라고 부르고 있다. 소금밭의 길이는 해안따라 300m정도이고 폭은 50m로 넓이는 4845㎡에 이른다. 염기(鹽期)는 봄·여름·가을이 적기였으며 생산된 소금은 색소 등 품질이 뛰어나 굵고 넓적한 천일염으로 중산간 주민들과 농산물을 교환하기도 했다."
구엄리에서는 1950년대까지 소금밭이 가동됐다. 1910년에 나온 '한국수산지'에는 이 마을의 소금 제작방식이 구체적으로 나와있다. 연안의 넓고 평평한 암석 위에 진흙으로 여러개의 제방을 만들어 증발지로 삼았다. 우선 해변부터 가까운 증발지에 바닷물을 퍼온 뒤 그것을 윗쪽의 증발지로 차례로 옮겼다. 마지막 증발지에 이르러 농도가 20도 이상되면 가마솥에 그 물을 달여 소금을 거둬들였다.
오성찬의 '제주토속지명사전'등에는 구엄리의 옛 지명 '엄장이'를 두고 소금과 연관있는 '염장이'가 '엄쟁이'로 바뀐 것이라고 말한다. 구엄리 소금밭에 대한 인상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애월읍지'(1997)는 이와 달리 엄장이(嚴莊伊)가 장엄한 마을 바위(巖)의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소금밭은 공유수면에 위치했지만 개인 소유로 매매가 이루어졌다. 구엄리 어촌계에 따르면 이 마을 염전은 전통적인 밭 나눔과 같이 동서남북 사표로 구획됐고 육지의 밭에 비해 가격도 높았다. 한 가구당 70~100㎡ 내외로 소유했고, 상속도 이루어졌다.
염전이 거래되었던 사실은 김상순씨(63)에 의해 확인됐다. 그의 부친이 염전을 사들였던 문서를 보관하고 있어서다. 단기 4286년(1953년) 음력 5월 6일 작성한 것으로 되어있는 염전매도증서다.
▲파도와 햇살에 의해 구엄리 염전의 바위 바닥에 자연적으로 소금 알갱이가 앉았다.
▶"8월쯤 소금 생산 시도할 것"
종이에 붓으로 쓰여진 이 증서엔 '일금 8백환'으로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 신다린내 아래'에 있는 염전을 김씨의 부친이 사들였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다린내는 현재 복원된 돌염전터의 서쪽 지경이다. 매도인, 매득인, 보증인의 이름과 함께 "위에 적은 염전은 본래 본인의 소유가 확실한 바 앞에 적은 대금을 전부 영수하고 귀하에게 매도하였으니 이후 다름이 없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보증을 연서하여 이에 증서를 작성'한다고 써있다.
소금밭에 얽힌 사연이 비교적 상세히 남아있는 구엄리는 염전을 복원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바닷물을 가둬놓는 작은 제방을 진흙으로 쌓았는데 파도에 자꾸 휩쓸려가 형체를 잃었다. 결국 시멘트를 섞어 제방을 제작했다.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데 들이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일도 어려웠다.
이노공 어촌계장은 "염전을 복원하는 대로 체험 행사를 진행하려고 했지만 예산, 인력 문제에 부딪혔다"면서 "오는 8월쯤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소금 생산을 시도해보고 난 뒤 내년부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염전을 활용한 '어촌체험마을' 구엄리의 색깔 찾기는 과거의 소금밭 이야기를 어떻게 현대화할 것인지에 성패가 달려있을 것이다. 소금밭은 기능을 잃었지만 일부 염전은 그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소금과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청정' 제주섬 염전의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한다.
염전도 밭처럼 사고 팔았다
김상순씨 1953년 작성된 매도증서 소장
▲김상순씨가 염전 매도 증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사진=강경민기자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 제주로 건너왔던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는 중에 발견했습니다. 당시 염전도 밭처럼 매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문서라 그동안 소중하게 간직해왔습니다. "
김상순씨(63·제주시 애월읍 구엄리)는 가로세로 각각 20㎝가 조금 넘는 얄팍한 종이를 조심스레 꺼내보였다. 염전 매도 증서였다. 거래된 염전 면적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50년대 중반 무렵까지 구엄리 염전에서 소금이 생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소금을 만든 뒤 서귀포 강정까지 가서 쌀과 바꿔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매도 증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소금밭을 일구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부모님들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구엄리의 전체 염전 규모는 3000㎡에 가깝다. 연간 생산량은 17톤을 조금 넘겼다. 염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면적당 생산량은 19.4㎏으로 제주지역 대표적 염전 지역이던 종달리의 3.7㎏보다 앞섰다. 그의 부친이 사들였던 소금밭은 이제 기능을 잃었지만 부근에 돌염전이 복원됐다. 마을에서는 수십년만에 소금생산을 재현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생산 원가를 따져야 하는 탓에 땀을 흘린 만큼 그 대가가 돌아올지 걱정"이라면서 "마을의 유산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