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명심 사진집 '검은 모살뜸'에 실린 작품. 작가는 여름철 제주섬 검은모래 찜질 풍경에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을 읽었다.
삼양동·이호·공천포 검은모래 찜질 유명 해안 하나둘 제모습 잃어모래유실은 난개발이 주원인… 화산섬 자원 보존 방안 머리 맞대야
검은모래를 지명으로 둔 지역중 하나가 제주시 이호동 현사마을이다. 검은모래 마을이란 뜻을 담은 현사마을 해안가는 이호테우해변(이호해수욕장)동쪽의 서마을에 비해 검은모래가 더 많이 분포해있다. 근래엔 이호동주민자치위원회와 이호동연합청년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호테우축제가 매년 열리고 해안가의 지명마저 이호테우해변으로 바뀌면서 떼배 마을로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이 곳에서도 검은모래 찜질이 이루어졌다.
▶기층민의 전통적 삶과 맞닿은 풍경
"몇년전까지도 검은모래 찜질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요. 서마을쪽에 약수로 불리는 문수물이 있어서 모래찜질 하는 사람들이 더욱 좋아했습니다. 모래찜질을 하고나서 시원한 용천수에 몸을 담그면 그 기분이 그만이라고 했습니다."
김달봉 이호동 어촌계장의 말이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2리 공천포(본보 8월 2일자 9면)처럼 어느 시절 이호동에서 마주쳤던 검은모래 찜질 풍경은 이제 옛 사진에서 만나야 할 지 모른다.
그중 지난해 출간된 육명심의 사진집 '검은 모살뜸'은 제주섬 검은모래의 남다름에 주목한 작업이다. 대전 태생의 사진가는 삼양·이호·공천포에서 행해지던 검은모래 찜질을 두고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적 민간요법이라고 했다.
"이 곳 섬 사람들은 한 여름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그야말로 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릴 때 검은 모래밭으로 간다. 그리고는 한껏 달아오른 모래 속에 몸을 깊이 파묻고 찜질을 한다. 그러면 사대삭신 육천마디 쑤시고 저리던 병이 낫는다고 한다."
작가는 사진집 서문에 이렇게 써놓았다. 흑백사진에 실린 검은모래 찜질 풍경은 강렬한 인상을 던진다. 사진에 담긴 할머니·할아버지들은 검은모래가 마치 무덤인양 누워있다. 사진가는 모래찜질 '치료법'에 빠진 이들의 거개가 여자들이라는 점을 눈여겨봤다. 그에 따르면 "평생 어려운 집안 살림을 온 몸으로 지탱하느라 그 무게에 깔려서 속으로 골병 든 아낙네들"이 단골 찜질객이다. 그것은 그의 작업을 꿰고 있는 기층민의 전통적 삶과 닿아있다.
▲육명심이 찍은 제주 검은모래 찜질. 한껏 달아오른 모래에 몸을 파묻으며 육신의 고통을 잊는다.
▶삼양 검은모래 문화재 지정 추진 무산
원로 사진가가 감탄했던 검은모래 찜질은 하나둘 과거의 이야기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삼양검은모래해변을 제외하면 검은모래 찜질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다. 육명심씨 역시 사진집을 마무리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던 일을 꺼내놓으며 "삼양 검은모래 사장조차도 이제는 재래식 모래찜질밭과 새로운 해수욕장이 한데 뒤섞여서, 이전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던 토속적인 향토색이 많이 증발하였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제주도는 지난해 알작지왓 등과 더불어 삼양 검은모래를 제주도기념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굳이 지방문화재로 관리하지 않더라고 보호할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등의 이유로 지정 작업이 무산됐지만 검은모래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삼양동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도 검멀레, 공천포, 이호동, 효돈 쇠소깍처럼 검은모래 분포 해안에 대한 지속적 점검이 필요하다. 마을지 '이호동지'(2007)에 따르면 이호동만 해도 방파제로 인한 모래유실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사마을의 호안벽도 모래유실에 영향을 미쳐왔다.
검은모래를 보유한 해변이 드문 탓에 유실의 심각성은 그만큼 더하다. 모래 유실의 원인을 짚으면 대부분 난개발로 결론이 모아진다. 그 때문에 화산섬 검은모래 자원을 어떻게 오래도록 지켜갈 것인지는 그간 진행된 난개발을 되돌아보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래밭이 오락시설로 찜질 여인 매번 줄어"
'검은 모살뜸'펴낸 사진가 육명심씨
"사라져가는 우리의 풍속을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시작한 작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서울예술대 사진과 교수를 지낸 원로 사진가 육명심(78·사진)은 전화 인터뷰에서 제주의 검은모래 찜질을 카메라에 담게 된 배경을 그렇게 말했다. 그가 검은모래 찜질을 맨 처음 촬영한 것은 1983년 무렵이다. '백민'연작을 위해 제주로 왔다가 우연히 그의 눈에 들어온 게 '검은 모살뜸'이었다. 80년대말 다시 제주를 찾아 검은모래 찜질을 찍었고, 2007년 또한번 제주를 방문한 끝에 사진집 '검은 모살뜸'을 냈다.
사진집에 실린 작품은 제주시 삼양동, 이호동,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2리 공천포 이 3곳에서 건져올렸다. 그중 삼양동의 검은모래 찜질 풍경이 가장 많다.
"검은 모살뜸은 자연의 치유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는 그는 제주를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검은모래 찜질 하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일에 대해 안타까움을 전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검은모래가 깔린 해안에는 거의 모두가 찜질하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십년 가량 건너뛰며 제주에 발을 디딜 때마다 찜질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차츰 줄어들고 해수욕을 하는 수영객들은 날로 늘어갔다.
"모래사장이 오락시설로 변하면서 검은모래 찜질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독차지했던 모래밭 풍속도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거지요."
그는 검은모래 찜질을 하는 민중들의 얼굴에서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봤다. 그래서 그의 '검은 모살뜸'엔 생과 사가 공존하는 느낌이 배어난다. 그의 말처럼 세상 사람들이 앞다투어 더위를 피해 달아나는데, 검은모래 찜질하는 이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더위를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사진가는 이를 두고 "검은 모래밭에서는 사람이 더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런 피서법이야말로 자연친화적이고 슬기로우며 소박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