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15](4)제주의 배-②덕판배

[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15](4)제주의 배-②덕판배
해상활동 펼쳤던 '탐라의 배' 흔적조차 가물가물
  • 입력 : 2010. 08.30(월)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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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제주박물관에 야외 전시되었던 덕판배의 해체 작업 장면. 해체돼 보관중인 복원품 부재는 앞으로 덕판배 원형 복원 작업에 활용될 수 있을까. /사진=이승철기자

육지 배에 비해 좁고 작은 규모
진상마 실어 날랐던 기록 전해져
복원품 관련 논란 성과로 이어야

떼배를 이용한 원거리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긴 어렵다. 그 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법으로 바닷길을 건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엔 원시 형태의 떼배로 바닷길을 헤쳤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선에 이어 속도 빠른 제주선

그럼에도 제주배의 상징물을 떼배로 한정지을 순 없다. 바다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다양한 해상활동을 펼친 제주섬 사람들은 떼배 말고도 다른 제주배를 가졌다.

"순행하면서 여러 포구에 이르렀는데, 뱃사공으로 하여금 시험삼아 왜선(倭船), 제주선(濟州船), 조선(漕船)을 새로 만들도록 하여 동시에 출발시켜 물이 흐르는 쪽으로 따라내려 가게 하였더니, 왜선이 가장 빨랐고 제주선이 그 다음이었으며 조선이 가장 느렸습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는데도 역시 같았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왜선은 판자가 얇아 빨리 가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

1491년 '성종실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뱃길을 통해 다른 세상과 만날 수 있었던 제주사람들에게 배는 필수품이었다. 그만큼 제주섬의 해안 특성을 고려한 배가 만들어졌으리라 본다.

바다를 누볐던 제주 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탐라는 위대한 해양국가'였음에도 조선왕조의 유교적 쇄국주의에 의해 그 존재가 와해되었다는 전제 아래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2006)를 냈던 고용희씨는 '탐라의 배'가 빠르고 날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바다에서 본 탐라의 역사'에서 김성호의 저서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을 인용해 "탐라, 백제의 배는 노와 키, 그리고 돛의 3요소를 갖춘 노형해선으로 바람이 없을 때에는 키를 거두어 노를 젓고, 바람이 불 때는 키를 장착해 돛을 달았다"면서 "탐라, 백제의 배는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장강 하류와 항주만의 모래판, 한반도 서해안의 갯벌과 제주도 모래 포구에 착선이 용이하므로 중국인들은 이 배를 사선으로 불렀다"고 썼다.

▶9m 크기 덕판배는 1척에 불과

오래된 제주배의 실체가 몇몇 기록에 의해 짐작되는 현실에서 덕판배를 제주 전통배중 하나로 꼽는 이들이 많다. 덕판배의 어원은 분명치 않다. 다만, 국어사전엔 '덕판'을 두고 '배의 이물 끝 가장자리에 덧놓은 널빤지'를 일컫는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덕판배란 명칭을 찾아보기 어렵다. '제주어사전'(2009)은 '덕판배'에 대해 '바닷가 바위에 배를 대어 우마 따위를 싣고 내리기에 적합하게 선수를 넓고 평평하게 만든 제주도 고유의 배'라고 적어놓았다.

덕판배는 연륙선, 상선, 진상선의 역할을 했던 제주배로 알려져있다. 고광민씨는 '제주도포구연구'(2003)에서 정조 5년(1781)의 제주순무어사 박천형의 서계를 통해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제주 덕판배의 특장을 끌어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주의 배는 육선(陸船)과 같지 않다. 모두 협소하다. 좁고 작은 본도의 배로 많은 말(馬)을 실어나른다. 배가 부서질 뿐만 아니라 말이 짓밟히고 넘어져 죽는 수가 많다. 예전과 같이 육선으로 말을 실어나르는 것을 제주의 모든 백성들이 바란다"고 했다.

제주교육박물관 소장 고문서에도 1794년 5월과 이듬해 5월에 제주도 삼읍의 배를 총동원해 진상마를 나누어 싣고 본토로 떠났던 기록이 있다. 고문서에 나온 덕판배의 크기를 보면 약 6.84m(四把半)에서 약 9.12m(六把)에 이른다. 이때 총 9척의 배가 쓰였는데 9m가 넘는 배는 1척에 불과했다. 그 당시 한반도의 왕래선이나 상선에 비할 때 크기가 작다.

덕판배는 일제강점기 선박 개량 정책 등으로 차츰 흔적을 감춘다. 1939년 제주지역에는 21척의 덕판배가 남아있었다. 해방 무렵엔 우도에 있던 1척마저 사라진다.

잊혀졌던 덕판배는 1996년 제주도 승격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주대학교박물관이 용역을 맡아 복원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제주대박물관에 야외 전시되었던 덕판배 복원품은 2001년 국립제주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자리를 옮겼지만 2008년 7월 끝내 해체된다. 이 과정에서 덕판배 복원품 원형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제주 해양문화의 궤적을 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는 여론이 제기됐다.

덕판배 복원품 원형 논란 남기고 해체
1996년 제작… 국립제주박물관 야외 전시후 2008년 철거


국립제주박물관은 2008년 7월 야외에 놓여있던 덕판배 복원품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2001년 박물관 개관 이래 관람객들과 만나왔던 덕판배 복원품은 그렇게 이름없는 나무 토막으로 돌아갔다.

박물관이 덕판배 해체를 결정한 것은 선박을 구조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하부구조의 분해가 심각한 데다 수리 보강과 보존 관리만으로 더 이상 배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박물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선박 전문가의 자문을 토대로 목제보존처리 전문업체인 경담연구소에 덕판배 복원품 조사 용역을 맡겼다.

용역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덕판배 복원품은 제주의 '전통적인 덕판배의 원형'으로 단정짓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담연구소는 선수재나 저판의 구조가 전통 한선과 큰 차이를 보이는 점, 복원된 닻이 선박의 규모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작아 실제 선박 운용시 사용할 수 없는 점, 일제강점기 이후 조림되어 재배되기 시작한 삼나무를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문화재의 원형 복원과 동떨어진 점 등을 들며 그같은 진단을 내렸다.

박물관은 복원품을 해체하면서 향후 제주 덕판배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고증자료와 문헌을 찾고 고선박 전문가, 설계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보고서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전통적인 덕판배에 대한 고증을 더해 복원에 활용할 수 있도록 덕판배 복원품은 부재별로 해체해 보존처리후 분리 보관하겠다고 덧붙였다.

덕판배 복원품 해체는 논란을 낳았다. 일각에서는 덕판배가 육지의 배와 다른 특성이 있는 데도 배의 구조 등이 전통 한선과 차이를 보인다는 이유로 덕판배의 원형이 아니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지었다고 주장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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