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25시]제주성은 왜 복원했을까?

[편집국 25시]제주성은 왜 복원했을까?
  • 입력 : 2012. 03.01(목)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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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년) 5월 전남 해남군 달량포에 왜선 60여 척이 쳐들어온 을묘왜변이 일어난다. 왜구는 약탈과 노략질로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절도사와 장흥부사, 영암군수 등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등 조선군을 유린했다. 조정은 어렵게 왜구를 막아내지만 물러난 왜구들이 제주도를 향한다. 6월 21일 왜선 40여 척이 제주 앞 바다에 닻을 내린 뒤 일주일 만에 1000여 명의 왜구가 뭍으로 올라와 제주성을 둘러싼다.

이때 민·관·군으로 구성된 제주군대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투 사상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두게 된다. 무관인 목사 김수문이 군사 70인을 뽑아 직접 돌격했으며, 정병 김몽군은 왜장을 활로 쏘아 쓰러트려 아군이 승세를 잡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 승전보가 전해지자 명종이 김수문에게 비단옷을 하사하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계급 특진의 영예를 준 사실은 이 전투가 상징하는 바를 알려준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 지점의 제주성 일부가 현재 복원돼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풍부한 이야깃거리까지 전해져 제주의 대표적 유형문화유산으로 내세울 만하지만 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엔 철문이 세워지고 그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관리당국에 문의했더니 어린이들이 올라가면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탐라지' 등 많은 향토지가 알려주는 것처럼 제주성은 적을 공격하기에 편리하도록 성 높이 쌓아 만든 '격대'와 활이나 총을 쏘고 몸을 숨길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쌓은 '타첩' 등을 완비한 군사시설이었다. 그러나 복원할 때 이걸 생략한 탓에 지금은 성 위에 올라가면 낭떠러지에 올라선 듯 불안한 느낌이 든다. 전투마를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평평했던 바닥은 울퉁불퉁한 돌덩이를 깔아놔 사람이 걷기도 어려울 정도다.

제주성보다 늦게 복원된 전남 나주성은 복원 규모만을 보면 초라할 정도로 작다. 그러나 제주성이 빠트린 부분은 물론 전통 성문 문루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까지 완벽하게 복원해 문화재 복원의 모범답안을 보여주고 있다. 답사코스로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 비교해보니 더욱 궁금해지는데, 꼭꼭 숨길 거면서 제주성은 왜 복원했을까? <표성준 문화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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