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박영효와 과수원댁(5)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박영효와 과수원댁(5)
개화파 거두, 친일의 뒤안길로 지다
  • 입력 : 2012. 08.13(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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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가 유배 중 과수원을 일궜던 제주시 독짓골. 그는 이곳에서 재배한 과수와 원예작물을 주민들에게 권장해 심도록 했다.

전근대적 의식구조 지배하던 제주에 근대화 바람
한일강제병합 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작위 받아

박영효는 1년 간의 감금생활이 끝났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제주에 머물렀다. 왕의 부마였으면서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서울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자 중앙 신문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보도되기도 했다. 황성신문은 1908년 8월 9일자에 "박영효씨가 해배 후에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봄에 개간한 과수원을 돌보기 위해 연말까지 머물 예정"이라고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이후에는 "제주 체류 중인 박영효씨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로 출발했다"거나 "제주도 체류 박영효가 마산을 거쳐 입경했다는 등 풍설이 있다"고 세간의 소문을 전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 박영효는 제주 부인의 절친한 친구인 윤씨 부인의 4남 고자환(高子煥·1900~1977)을 양자로 삼았다. 제주 부인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시 어린 소년인 고자환이 양자로 가던 날은 박영효 집의 집사와 노비들이 와서 윤씨 부인과 아들을 데려갔다. 그 후 고자환은 독짓골에서 살며 박영효와 제주 부인을 친부모처럼 모시고 살았다. '빙벽'과 '최후의 계엄령',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 등 권력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드러내는 소설로 유명한 제주 출신 소설가 고원정씨가 바로 고자환의 손자다.

틈나는 대로 지방의 어린 자녀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기도 했던 박영효는 유배가 풀려 서울로 떠나면서 고자환을 데리고 갔다. 고자환은 서울에서 경성고보를 졸업한 후 제주로 돌아와 결혼하고 교직에 있다가 퇴임했다. 고자환이 성인이 되어 제주에서 결혼하면서 박영효와는 소원하게 됐다. 제주 부인과의 인연도 자연스럽게 엷어졌을 것이다. 고자환 댁에는 박영효가 써준 친필액자와 상경하라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있다. 액자와 편지는 고자환의 손자 고원정씨가 소장하고 있다.

박영효는 3년 동안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매우 고급스럽게 지냈다. 제주시 외도동에는 수백 년된 해송과 팽나무 고목들이 우거진 외도천이 있다. 이곳은 제주도에서는 드물게 사철 냇물이 흘러 옛 선인들은 풍류를 즐기기 위해 반석을 놓아 월대(月臺)를 만들었다. 박영효는 기망(旣望)이면 이곳에서 시회를 열어 제주의 명사들과 어울려 시도 짓고 은어회를 즐겼다.

도민의 계도에 뜻을 뒀던 그는 찾아오는 지방 선비들과 이웃들을 물리치지 않고 만나 나라와 민족의 살 길은 오직 자주독립에 있음을 역설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근대사상을 강론하면서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제도와 인습 등의 저해요소를 타파해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또한 틈나는 대로 지방의 어린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시키기도 하면서 전근대적 의식구조가 지배하던 제주사회에 새로운 문명과 사상을 불어넣어 제주도의 근대화를 일궈냈다.

이때 그의 주변에 모인 인물로는 해미현감을 지낸 김응전과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형제, 제주항공의 모기업인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시아버지이면서 이재수난 때 대정군수를 역임한 채구석, 구한말 제주 최고의 부호로 대정군수 재임 때 진휼미 100석을 내놓았던 송두옥, 제주향교의 도훈장(都訓長)으로 서화에 뛰어나 추사 유배지의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秋史金先生謫廬遺墟碑)를 쓴 홍종시, 한말 의병장 기우만의 문하생으로 을사늑약 이후 기우만의 구국 격문을 몰래 가지고 제주에 귀향한 안병택 등이 있다.

제주를 떠난 후 그는 시종일관 친일의 길을 걸었다. 한일강제병합 후 1910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1926년에는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다.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을 관망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3·1운동 후에는 초대 동아일보사장을 지냈다. 그는 1939년 서울 숭인동 자택에서 79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하직한다.

그가 제주에서 고자환을 양자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함께 살았던 여인에 대한 배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함께 사는 사랑스런 여인이 아끼고 추천하는 소년이기에 양자(養子) 형식으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박영효의 가문인 반남(潘南) 박씨(朴氏)가 아닌 제주 고씨의 자식을 우리나라 호적법상 정식 양자로 입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영효에게는 영교(泳敎), 영호(泳好)라는 두 형님이 엄연히 계셨고 양자를 삼을 만한 조카들도 있었다. 고자환의 부모도 이런 점 정도는 알고 응했을 것이다. 고자환을 서울로 데려가 교육의 혜택을 베푼 것으로 둘 사이의 양자관계는 이미 끝나버린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 후 독짓골 과수원의 양어머니에 대한 고자환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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