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기획]청백리 류헌의 죽음

[유배 기획]청백리 류헌의 죽음
석방돼 돌아가다 해상서 왜구에 피살
  • 입력 : 2012. 08.16(목)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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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에게 직언해 제주에 유배됐다가 중종반정 후 석방돼 돌아가던 중 왜구에게 피살된 류헌의 후손들이 제주를 방문해 뿌리찾기에 나서고 있다. 왼쪽부터 김익수 사료조사위원, 류헌의 후손인 류기룡·기종·준희·원희·기광씨, 고매숙 제주시 문화유적지관리사무소장.

연산군에 직언 장 1백대·유배형 남다른 이력
후손들 제주방문 옛 제주성터서 자취 더듬어

조선의 유배인 중 제주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가다 왜구를 만나 피살된 류헌(柳軒·1402~1506)의 삶과 기록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아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조선왕조를 통틀어 200명 안팎에 불과한 청백리로 선정될 만큼 남달랐던 그의 자취를 찾기 위해 후손들이 제주를 방문했다.

1506년 9월 21일 추자도 인근 해상에서 류헌 일행을 태운 배가 왜구의 습격을 받아 그를 포함해 5명이 왜구의 창에 맞아 피살된다. 조선왕조 500년간 수백여명이 6악처 중에서도 3악처(제주·정의·대정)로 악명을 떨친 제주에 유배돼 불귀의 객이 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석방돼 돌아가던 중 이렇게 왜구의 습격으로 숨진 사례는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대사간 류헌은 1504년(연산군 10년) 6월 연산군에 직언을 했다가 장 1백대를 맞고 관노로 전락해 제주에 유배됐다. 지금까지 그는 연산군 때 갑자사화를 일으킨 간흉(姦兇)을 공격한 죄로 유배에 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경연에서 내수사(內需司·왕실 재정을 관리하는 관아)의 장리(長利·이자) 문제를 제기해 연산군의 눈밖에 나 유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내수사가 춘궁기인 2~3월 굶주린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줬다가 가을에 법정 이자율을 초과해 돌려받자 이를 문제삼아 왕실을 비판했던 것이다. 왕실에서 고리사채를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자 류헌은 "내수사의 장리는 나중에 어디에 쓰려는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앞서 1500년(연산군 6년) 8월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도 경연에 참석해 내수사의 장리 문제를 비판하면서 장리를 걷으러 다니는 위차(委差)는 관리가 아니므로 말을 내주어선 안된다고 논계하기도 했다. 연산군 부인 신씨가 고리대금을 통해 얻은 돈으로 승려들을 통해 도성에 사저를 짓자 임금이 참석하는 경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했던 것이다.

당시 연산군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계문(啓文)이나 상소를 올리는 관료들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형이나 유배를 보내는 기훼제서(棄毁制書)를 적용해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류헌에 대해 참형을 처하라는 주청이 있자 연산군은 "류헌의 어짊을 알지만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다"며 1504년 6월 승지 권근에게 결장(決杖·곤장을 때림)을 감시하게까지 한 뒤 3악처 중에서도 가장 살기 어렵다는 대정현 유배 명령을 내린다.

유배 중이던 류헌은 1506년 4월 서울로 불려가 장 80대를 맞은 뒤 다시 제주에 유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당시 제주목사 육헌이 탐관오리로 파면되자 도망가버려 그를 잡기 위해 의금부에서 낭관을 파견한 일이 있다"며 "이 사건 직전에 하한문이 채홍준사(採紅駿使·연산군 때 아름다운 처녀와 좋은 말을 구하려고 지방에 보내던 관리)로 제주를 방문했을 때 육헌이 류헌을 관노로 삼지 않고 대우를 해준 사실을 적발해 조정에 보고하자 육헌을 파면하고 류헌은 서울로 불러 정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 직후인 1506년 중종 반정으로 정권이 바뀌게 되자 중종은 류헌을 기용하기 위해 석방한다. 그러나 류헌은 함께 유배됐던 김양보 등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나 육지로 향하던 중 추자도 인근 해상에서 왜구를 만나 피살되고 만다.

이때 이들을 인솔하던 제주근리사 이운거가 가까스로 살아남아 조정에 사고 소식을 보고하자 중종은 동래부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이어 제주목사로 하여금 시신을 처리하게 하고, 그를 청백리로 선정한다.

류헌의 호 낙봉을 딴 전주유씨 낙봉공파에서는 최근 류헌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4일 일행 4명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제주를 방문한 류기룡(82) 낙봉공파 종회 회장은 "류헌은 연산군의 폭정이 두려워 모두가 피할 때 상소도 아니고 임금을 직접 대면해 직간한데다 사후에는 청백리로 선정될 만큼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며 "유배지에서 그 흔적이나마 찾아서 유허비라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위해 제주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김익수 위원은 "류헌은 당시 갑작스런 사고와 죽음 때문에 문집도 전해지지 않아 제주 유배생활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고,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소재 그의 묘지는 시신 없이 옷으로만 조성한 것이어서 임금이 지시한 사후 조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많은 것이 베일에 가려 있다"며 "연산군에게 직언한 몇 안되는 인물이고, 석방돼 돌아가던 중 왜구에게 피살됐으며, 사후에는 청백리로 선정되는 등 제주 유배인 중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어 조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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