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3)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3)
시상 지켜보며 "차라리 콱 죽고 싶을뿐"
  • 입력 : 2012. 09.03(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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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로 제작된 김윤식의 말년 작품.

▲족자로 제작된 김윤식의 말년 작품.

一曲山歌瑟正希
 (한 곡조 산 노래에 거문고 가락 바로 맞추는데)
投林夕鳥識依歸
 (숲을 향해 저녁 새는 여전히 돌아갈 줄 아네.)
癡兒寄信常憂食
 (어리석은 아이 소식 부치며 늘 먹을 걱정이고)
病妾經年不送衣
 (병든 아내는 일 년 지나도록 옷을 보내오지 않네.)
<김익수 역>

편지·신문 애타게 기다리며
중앙 정가·집안 소식에 촉각

김윤식은 제주 유배 생활 중 서울 본가에 있는 아들과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집안 소식과 함께 중앙 정가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편지와 함께 신문도 받아보면서 국내외 정세를 파악했다. 당시는 이미 우체국 업무를 관장하는 우정총국이 설치돼 근대적 우편제도가 도입됐지만 제주도에까지는 그 혜택이 미치지 못했다. 편지는 서울을 오가는 관리와 장사꾼, 노비들에 의해 전해졌다. 육지와 섬을 잇는 정기선도 없던 때라 빠르면 7일 만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수개월이 걸리는 때도 있었고, 다른 날짜에 보낸 세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가 편지로 들은 건 집안소식뿐만이 아니었다. 1898년 7월 25일 커피에 독을 타 고종을 독살하려 했던 사건도 그는 전해 들어 일기에 써놓았다.

"황상(皇上)의 탄신 다음 날 저녁에 대소조(大小朝·고종과 왕세자)께 서양요리를 올리는데, 먼저 가배차(커피)를 드렸더니 구토하며 어지러워 쓰러졌고 밤이 깊어서야 회복되었다. 좌우에서 차 맛을 보았던 자도 어지러워 쓰러지니 독을 넣은 게 분명하였다. 궐 안은 당황하여 위병이 경계를 엄히 하며, 주방에서 일하는 궁중나인 10여 명을 경청(警廳·경무청)의 엄한 신문에 붙였다."

유배인이라고 하기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그였기에 서울 소식은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즐길 거리 중 하나였다. 하루는 함께 유배됐던 이승오의 집안 하인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집에 보내는 편지를 부쳤는데 술에 취해 편지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술 취한 김에 편지를 잃어버려, 어디다 흘려버렸는지 알지 못한다니 정말 탄식할 노릇이다." 다행히 이 편지는 유배지에 따라온 그의 몸종이 찾아다준다. "기동이가 산저포에 갔다가 잃어버렸던 집에 보내는 편지를 찾아 가지고 왔다. 물에 잠겨 밤을 샜으니 술 취한 놈이 한 짓이 몹시 통탄스럽다."

당시 일본으로 망명해 있었던 철종 임금의 부마 박영효 집안이 연루돼 일어난 사건도 김윤식은 기록해놓고 있다. "산을 흔들고 땅이 가라앉는 굉렬한 폭발 소리가 소안동 박영효 집에서 나면서 두 사람이 즉사하였는데, 경서에서 집주인 김 주사를 잡아다 문초한 즉, 경상도 나그네와 따라온 한 사람이 한창 폭약을 만들다가 저절로 폭발이 일어나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온 집안에 있는 남녀를 잡고 보니, 박영효의 집안 식구도 역시 그 중에 있어서 바야흐로 조사하는 중인데, 저녁에 또 남촌에서도 폭발하는 변고가 있어서 성 안 사람들은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다니 이상하고 해괴한 일이다."

김윤식은 박영효보다 26살이나 많았지만 실학자 박규수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으며, 김윤식의 사촌형 김만식은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수신부사로 동행한 인연이 있다. 박영효가 갑신정변이 실패해 일본으로 1차 망명했을 때에는 박영효 아버지 박원양이 죽자 장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역적의 아비라 해서 모두가 꺼리고, 대신들이 반역자를 두호했다고 탄핵한 일도 있었지만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유배 생활 초기 하루가 멀다 하고 육지를 오가는 배가 뜰 때마다 편지를 주고받던 김윤식은 차츰 편지 보내는 횟수를 줄인다. 3년째 되는 해에는 3개월이 지나서야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서울에서는 계속 편지를 보내온다. 그는 편지와 함께 신문을 받아보면서 중요한 사항을 일기에 꼼꼼히 적는 방법으로 나라 안팎의 정세를 파악하고 정치 감각을 유지해간다. 당시 국내에서는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대립해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훗날 개화파 거두로 박영효와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살해한 뒤 제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홍종우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황국회장 홍종우와 길영수가 보부상 수 천 명을 불러 모아 10월 초 9일 만민공동회에 돌진하여 공격하니 치사자 1명, 부상자 수십 명이 발생하면서 사건의 기미가 크게 변하였다. 온 성이 솥에 물 끓듯 하고 각각 무리를 져 한 곳에 모여 만나기만 하면 서로 때려서 보부상도 또한 사상자가 많았다. 민인들은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며 분하고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민영기, 김정근, 홍종우 등의 집을 때려 부쉈다."

그의 표현처럼 시상(時象·때 돌아가는 형편)이 시끄러운 것이 어제 들은 바나 오늘 들은 것이 같을 때 제주에서도 큰 소동이 벌어지려는 조짐이 나타난다. 때 돌아가는 형편을 지켜보던 그는 짧은 글로 심경을 표현하기도 했다. "차라리 콱 죽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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