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136)마리아나 제도 르포-(2)휴양지의 삶과 죽음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136)마리아나 제도 르포-(2)휴양지의 삶과 죽음
노무자·위안부·징병 등 '인간 공출'로 수만명 희생
  • 입력 : 2013. 08.15(목)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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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 등 남양군도로 끌려가 희생된 한인들을 추념하기 위해 세워진 태평양한국인추념탑. 이승철기자

1910년대부터 이주 시작…1945년까지 지속적 강제동원
끌려간 한인 상당수 적도의 뜨거운 태양아래 총알받이로 숨져가…
희생자 추념사업 민간이 주도…정부·지자체 지원·관심 절실


전쟁의 섬에서 휴양의 섬으로 변한 사이판에서 한인들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깎아지른 마피산 절벽 아래서, 혹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닷속에서도 확인된다. 티니안섬의 밀림속에서나 괌의 어두컴컴한 지하갱도에서도 한인들의 고통과 비극을 느낄 수 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얼마나 많은 한인들이 남양군도로 끌려가 희생됐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강제 징용으로 총알받이에 내몰리거나 노무동원된 한인들도 대부분 쏟아지는 포탄 속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간 경우는 또 어땠을까. 제주도라고 강제징용이나 노무동원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인의 남양군도 이주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한인의 이주는 일제 식민시기에 걸쳐 일본의 전쟁수행과 궤를 같이한다.

일제가 남양군도를 점령한 것은 1914년이다. 하지만 일제는 19세기 말부터 남양군도를 해상교역이나 개척대상지로 노리고 있었다. 당시 남양군도는 서구 열강의 지배하고 있어서 일제의 남양군도 진출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양군도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온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일제는 1914년 10월에 독일령인 남양군도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다.

이 무렵 수백 명에 이르는 한인의 남양군도 이주가 시작됐다. 그 배경은 제당업을 집중육성할 필요성을 느낀 일제의 정략적인 유입책이 영향을 미쳤다. 제당업은 남양군도를 장기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근간이었다. 사탕수수 농장 등을 개척하기 위해 한반도와 오키나와 등지에서 개척노무자들이 남양군도를 향했다. 이들에게는 열악한 노동조건이 기다리고 있었고, 한인들은 파업을 벌이면서 저항에 나서기도 한다.

▲마나가하섬의 일본군 포대.

한인이 대규모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1939년부터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1938년에 남양군도 거주 한인은 704명이었다. 그런데 1939년에는 1968명으로 불어난다. 이후 한인들은 매년 급증했다. 하지만 이 숫자는 민간인 이외에 군속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일제는 1941년 9월부터 군사기지 구축을 위해 해군작업애국단의 형태로 노무자들을 징발했다. 이때부터 1942년 3월까지 불과 6~7개월 사이에 1만4000여명이 남양군도로 수송된다. 전쟁이 끝날 때 까지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 등으로 계속해서 전선으로 끌려갔다는 점에서 그 수는 수만 명을 헤아릴 것으로 짐작된다.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원된 시기는 일제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전쟁을 벌이던 때다. 1937년부터 일제는 중국과의 전면전에 나섰고,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일제는 중국과의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부족한 노동력과 군인, 군속을 한반도에서 조달했다. 전시물자 공출뿐만 아니라 온갖 구실로 수만 명의 '인간 공출'이 이뤄졌다.

이처럼 한인들은 일제에 의해 전쟁터로 내몰리고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죽어갔다. 전쟁으로 인해 남양군도 동원자의 생환율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것으로 알려진다.

수많은 한인들의 죽음과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한인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위무하는 일은 현지 사이판한인회와 민간단체의 몫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과 관심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살절벽이 있는 마피산 기슭 마피도로 근처. 이곳에는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를 중심으로 1981년 세운 '태평양한국인추념평화탑'이 있다. 회색빛 5각 6층의 기단위에 탑신이 얹어있는 형태이다. 탑의 제일 위에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가 한국을 향해 날아오를 듯 앉아있다.

사이판 최대 절경의 하나인 마나가하섬 인근 바닷속은 한인들을 위로하는 해저위령비가 있다. 당시 마나가하섬 인근은 치열한 격전지였다. 해저위령비가 위치한 곳은 난파선이 침몰한 수심 10m의 바닷속이다. 해저위령비 주변으로 스쿠버다이버들은 사이판의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친다.

취재팀을 안내한 사이판한인회의 고진학씨는 "고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광차 찾고 있지만 과거의 아픈 역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어 가슴이 아프다"며 당국의 지원과 관심이 아쉽다고 말했다.

▲마나가하섬의 일본군 포대. 이 섬 바닷속에는 한인 해저 위령비가 있다.



[사이판]

사이판은 남북으로 22㎞, 동서 길이는 3~8㎞로 제주도의 10분의 1 정도 크기다.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며 인구는 약 6만여 정도. 원주민은 차모로인과 캐롤리니아인이며 필리핀인이 많이 거주한다. 중국인은 5000명, 한국인도 1000명 정도 된다. 1521년 스페인 탐험가 마젤란에 의해 발견돼 스페인 지배하에 있었지만 1989년에 독일이 섬을 사들여 식민지로 삼았다. 현재는 미국령이다.

사이판 주변 바다는 마리아나 해구로 유명하다. 마리아나 해구는 길이 2550㎞, 평균 너비 70㎞, 평균 수심은 7000~8000m에 이르며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비티아즈해연(1만1034m)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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