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산 정상에서 보이는 바냐데루 평원.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는 한인들을 동원해 이곳을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이승철기자
'강철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속에비행장에서, 밀림 속에서 끌려간 한인들 희생살아남은 경우는 전쟁포로가 되어
남양군도에서 하와이까지 이송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에 회부돼 1948년 교수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단언했다. "사이판은 '난공불락'이다." 도조 히데키는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지원제 등을 실시, 수많은 청년들을 전쟁으로 내몬 주역이다.
사이판 전투는 1944년 6월11일 미군의 함포사격과 전투기의 폭격으로 시작됐다. 미군은 4일간 폭격을 퍼부은 끝에 6월15일 사이판에 상륙, 7월9일 섬을 완전 장악했다. 도조 히데키가 그토록 호언했지만 한 달도 못 버티고 함락하고 만 것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지상전 가운데 하나인 사이판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도조 히데키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결국 물러나게 된다.
전쟁 기간 미군은 무려 8500톤이나 되는 각종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강철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속에 일본군 4만3000여명, 미군 1만5000여명 및 민간인 등 7만5000여명이 죽어갔다. 이 중에는 노무자로 혹은 징용으로 강제로 끌려간 한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이들은 비행장에서나 밀림 속에서, 바다 속에서 희생됐다. 그야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경우는 미군의 포로가 되어 하와이까지 흘러갔다.
사이판 북부 마피산(해발 249m)의 정상부. 200여m의 수직절벽이 벼랑처럼 이어졌다. 수직절벽 위에서 바냐데루라 불리는 평원지대가 발아래 펼쳐졌다.
일제는 당시 바냐데루 평원을 전투기 비행장으로 계획했다. 그리고는 농장노동을 하던 한인들을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 투입했다.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 신분은 민간인에서 군속으로 바뀌었다. 끌려간 노무자들은 그렇게 전장으로 내몰렸고, 상당수가 치열했던 사이판 전투에서 죽어갔다.
마피산 절벽의 벼랑은 수이사이드 클리프, 즉 자살절벽이라 불린다. 1944년 7월 미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했던 일본인들이 벼랑 위에서 몸을 던진 곳이다. 정상부에는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서 있다.
바냐데루 평원이 끝나는 지점, 그곳은 반자이 클리프라 불리는 만세절벽이다. 일본군들과 민간인들이 '천황 만세'를 외치며 바다로 몸을 던진 곳이다. 전쟁 전에는 마피갑으로 불리다가 반자이클리프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 각종 대공화기 등이 전시된 라스트 코만도의 모습, 후일 일본인들의 관광 필수코스가 됐다.
이곳은 2005년 종전 60주년을 맞아 사이판을 방문한 아키히토 일왕부부가 찾으면서 세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전쟁에 대한 책임이나 희생자에 대한 언급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당시 일왕부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방문 일정도 자국민 희생자를 중심으로 한 전몰자만 추모하는 형식으로 진행돼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만세절벽 주변은 일본정부와 단체 등에서 세운 위령탑과 위령비가 줄지어 있다. 그 사이에 2008년에 건립된 한국인을 추모하는 '전몰순난자위령탑'이 서 있지만 씁쓸하기만 하다.
희생당한 한인들의 흔적은 사이판 최대의 성당인 마운트카멜 성당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성당은 전쟁 당시 파괴됐다가 전후 복구됐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사이판을 함락한 미군의 포로수용소가 위치해 있었다. 성당 표지판에는 한인들도 이곳에 수용돼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가 전장으로 내몰리는 바람에 미군의 전쟁포로가 돼버린 것이다. 기막힌 운명이다. 그렇지만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채 폭격으로, 혹은 총알받이로, 때론 굶주림으로 죽어간 한인들 보다는 훨씬 처지가 나았다.
포로 수용소의 한인들은 하와이까지 끌려가기도 한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는 3000명 이상의 한인 청년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군에 의해 남양군도에서 이송됐다. 이들은 1946년에야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해안변에 조성된 토치카.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끔찍한 소문도 있다. 사이판의 담수호인 '수수페' 호수에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된 한인들이 집단 수장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한인들의 희생이 컸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치열했던 전투는 섬의 식생과 자연경관까지 바꿔놓았다. 전후에 사이판의 식생을 점령하다시피 한 것은 '따간따간'이라 불리는 나무다. 아카시아와 비슷한 이 나무는 현지어로 '쓸모없는' 이란 뜻이라고 한다. '쓸모없는' 나무가 어떻게 해안에서부터 밀림 깊숙한 곳까지 왕성하게 자라게 됐을까.
사이판을 점령한 미군은 초토화된 섬의 식생을 복원하기 위해 이 나무를 선택했다. 생장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단시일에 섬을 복구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다. 미군은 섬 상공을 헬기로 선회하며 따간따간 나무 씨앗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무성하게 자란 이 나무는 오늘날 현지인들이 바비큐용 숯을 만드는 용도 외에는 별로 쓸모가 없다고 한다.
따간따간 나무가 자라는 만큼이나 사이판전의 흔적이나 기억도 차츰 희미해진다. 한 해 수 만 명씩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한인들의 한과 고통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