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138)마리아나 제도 르포-(4)남양흥발의 정체는?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138)마리아나 제도 르포-(4)남양흥발의 정체는?
'바다의 남만주 철도'… 한인 강제동원에 깊숙이 관여
  • 입력 : 2013. 10.02(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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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에 남겨진 남양흥발의 사탕수수 재배시설. 당시 로타에도 한인들이 일제에 의해 동원돼 사탕수수 재배 등 갖은 노역에 시달렸다. 이승철 기자

북쪽에 ‘만철’이 있다면 바다엔 ‘남흥’
수많은 한인 노역과 전쟁으로 내몰아
패망 후에는 전범기업으로 해체돼
설탕왕 기념공원, 패전을 기억하고
일본통치 교묘하게 미화하는 장소
전쟁의 책임 등은 찾아볼 수 없어


오늘날 전범기업 하면 흔히 미쓰비시를 떠올린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직간접 지원 아래 많은 기업들이 한인들을 동원하고 전쟁으로 내몬다. 남양군도의 경우는 남양흥발주식회사가 대표적이다.

"북쪽(대륙)엔 '만철'(滿鐵)이 있다면 바다엔 '남흥'(南興)이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비롯 아시아 각국을 상대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혈안이었을 당시 나돌던 말이다. 여기서 '만철'이란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말한다. '남흥'은 남양흥발주식회사이다.

'만철'로 잘 알려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었다. 일본의 국책회사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이었다. 철도경영의 가면을 쓰고 중국 대륙 침략을 선도한 것이 만철이었다. 일본제국의 싱크탱크라 불릴 정도였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만철은 포츠머스조약(1905)에 의해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은 철도와 부속지를 기반으로 1906년 설립됐다. 일본 패전때까지 다방면에 걸쳐 식민지배의 바탕이 된 조사와 정책을 펼친다. 결국 만철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사이판국제공항내의 콘크리트 방공호. 이전에 한인들이 동원된 사탕수수 농장이었다.

이와 비견되는 남양흥발은 남양군도를 주름잡으며 '바다의 남만주철도'라 불리기도 했다. 북쪽의 만철처럼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 수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남양흥발은 일본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 기간에 이뤄진 수많은 한인의 강제 동원과 징용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남양흥발은 1921년 설립 당시부터 일본 해군과 외무성이 주도했다. 형식상은 민간기업이나 실질적으로는 국책기업에 준했다.

일제가 남양군도를 장기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주목한 것은 제당업이었다. 그 중심에 남양흥발이 있었다. 남양흥발은 사이판 곳곳에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하고 제당업 육성에 나서기 시작했다. 부족한 노동력은 한반도 등지에서 조선총독부 등의 지원 아래 온갖 명목으로 동원했다. 본격적인 한인 동원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다.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계기가 된다.

중일전쟁으로 일본 국내에서의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일제는 외부로 눈을 돌렸다. 1939년부터 남양군도로 한인들이 대규모로 동원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일반노무자들 이외에도 군속(군에 동원된 민간인) 동원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구체적인 규모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제주도민들도 상당수 동원됐다.

한인들이 동원된 사탕수수 농장은 전쟁 기간에는 군사비행장으로 바뀌고, 일본 패전 후에는 국제공항이 된다. 미군의 전투비행장이 되기도 한다. 남양흥발이 1933년 사이판 아스리트 직영농장 내에 건설한 비행장은 오늘날 사이판 국제공항으로 변했다. 카그만 반도 남부 남양흥발 제2농장은 사이판전투가 끝난 후 1944년 미군비행장으로 조성됐다. 당시 유도로가 남아있으며, 남양흥발 건물도 볼 수 있다. 남양흥발 제3농장이 있던 바나데로 평원은 일본군 비행장으로 바뀌었다.

남양흥발은 1937년 이후에는 해군의 특수공작에 회사 소속 노무자들을 투입하는 등 일본의 전쟁수행을 선도했다. 현지 일본군과 군민협정을 체결하고 한인 등을 군무원으로 동원했다. 남양흥발은 결국 일본 패전 후 전범기업으로 분류돼 소멸하고 만다.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사이판의 중심지 가라판. 이 곳에는 남양흥발 초대 사장이었던 설탕왕 마츠에 하루지(松江 春次)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슈가 킹(Sugar King) 공원 동상은 마츠에 하루지 생전인 1934년에 세워졌다. 남양흥발이 사이판에서 일제의 첨병으로서 한창 제당업으로 식민지 경영에 힘을 쏟을 때 세워진 것이다.

▲사이판 중심지에 세워진 설탕왕 마츠에 하루지 동상.

동상 주변의 비는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내세우는 평화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일제 식민지배로 인해 많은 고통과 희생을 안겨준데 대한 역사적 사실과 책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평화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기념공원에선 한인들과 현지인들을 포함 수많은 사람들을 전장으로 내몬 전쟁책임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일본의 패전을 기억하고 일제 통치를 미화하는 장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전쟁책임은 회피하고 제당업으로 사이판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는 논리로 식민지배를 교묘하게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양흥발의 흔적은 티니안과 로타 등 남태평양에 점점이 박힌 섬에서 찾아볼 수 있다.

티니안 북부 노스필드 지역도 한인들이 대규모로 동원돼 사탕수수를 재배했던 곳이다. 인근 로타섬의 송송빌리지 해변에는 남양흥발 제당공장 시설이 위압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

촘촘하게 쌓아올린 붉은색 벽돌의 공장건물과 고철덩어리가 돼버린 각종 장비들, 녹슨 기관차 등에서 당시 겪었을 한인들의 고통과 희생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일제에 의해, 전범기업에 의해 남양군도로 끌려간 한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혹독한 노동과 총알받이로서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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