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니안 산호세마을의 벨타워. 스페인시대의 유산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포격으로 일부 허물어졌으며 탄흔이 선명히 남아 있다. 이승철기자
일본 최근 극우보수화 경향 속사이판·괌·티니안 등 섬 곳곳서위령비 세우며 역사왜곡 전쟁 미화한인회 아픈 역사적 사실 잘 몰라
청소년들 위해 자료 발굴 등으로
제대로 인식토록 정부 관심 가져야·
마리아나 제도는 어디를 가나 일상의 풍경과 전장의 비극이 교차돼서 나타난다. 사이판과 괌 등은 마젤란이 처음 발견한 16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1898년부터 지배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본이 차지하게 된다.
수세기 동안 번갈아가며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면서 역사의 아픔은 중첩돼서 켜켜이 쌓였다. 원주민들의 일상 공간에서, 혹은 신성시하는 터전에서, 아름다운 경관과 현대식 리조트에서 식민지배의 어두운 그늘과 전장의 아픔이 진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여전히 마리아나 제도 곳곳에 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의 상흔은 거대한 군사시설물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티니안의 심장부인 산호세 마을. 이곳 중심부에는 스페인 통치시대의 유산인 벨타워가 고즈넉하게 서 있다. 벨타워는 석양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벨타워 표면에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탄흔이 생생하게 박혀 있다. 벨타워의 일부도 파손된 채 그대로여서 섬의 지난한 역사와 아픔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근처에 티니안 등 마리아나 곳곳에서 숨져간 한인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서있다.
로타 섬의 송송빌리지 중심에 자리한 산 프란시스코 교회는 일본군 포탄을 종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이판한인회 한글학교에서 취재팀이 학생들에게 당시의 아픈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일상과 전쟁의 기억이 혼재된 곳. 전쟁유산과 고급 리조트가 동거하는 곳이 바로 마리아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시간이 멈춰버린 곳도 많다. 수많은 한인 유골이 발견된 티니안의 정글속에 감춰진 탄약고나 연료저장고, 일본군사령부 등은 이제 막 폭격을 당한 듯 아수라장 그대로다. 주변에 널브러진 탄약통과 연료통, 휘어진 철근, 구멍 뚫린 건물 등등은 치열했던 전투의 생생한 흔적이다. 붉은 빛 황토가 듬성듬성 보이는 괌의 고원지대에 남아있는 미군 전차, 밀림 속에 숨을 죽이고 있는 일본군 포대 등은 70년 전의 광풍을 말없이 보여준다. 대부분은 강제 동원 한인들의 희생과 관련이 있다.
전쟁의 상흔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시간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70년 전에 총칼로 마리아나 제도를 침략했다면 오늘날은 각종 위령비 등을 세우며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데 혈안이다. 이를 통해 일제 침략의 역사, 가해의 역사를 지우고 어디까지나 피해자라는 점을 내세우려는 듯하다.
사이판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은 대부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과 관련된 전쟁시설을 찾는다. 안내는 사이판 현지에서 활동하는 전쟁가이드가 주로 맡는다.
사이판의 대표적인 전쟁유적지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라스트 코만도. 이곳은 일본군 최고 수뇌부가 자결한 최후사령부로 왜곡돼 일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일본인 전쟁가이드는 '조국의 국토 방위를 위해 산화한 영령들을 위해' 30여 초간 묵념을 하게 하고 안내를 한다. 아시아 태평양 여러 나라를 침략하고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침략전쟁을 '국토방위'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티니안 카롤리나스 대지의 자살절벽에 있는 일본군 위령비. 주변엔 온통 위령비로 채워져 있어 일본군 위령공원을 방불케 하고 있다.
괌에서 만난 일본인 전쟁가이드의 말은 충격적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은 일본인이었다. 한국인들은 피해자라고 하는데 피해자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 강제징용이나 강제노동이라고 하지만 당시는 아니다. 당시 일본이 잘못됐다, 틀렸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일본 사회의 극우보수화 경향 속에 사이판과 괌에는 일본군과 관련된 곳이면 어디든지 위령비를 볼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자고나면 위령비가 늘어난다고 할 정도이니 그 수를 짐작할 만하다.
티니안 남부 해안 카롤리나스 대지 주변은 자살절벽이라 불리는 곳이다. 티니안 전투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떨어져 내린 곳으로 주변은 온통 크고 작은 위령비로 가득 채워졌다. 어디에서나 전쟁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이판의 만세절벽이나 자살절벽도 마찬가지다. 위령비뿐만 아니라 사이판의 중심지에는 전범기업인 남양흥발의 초대 사장인 마츠에 하루지를 기리는 슈가킹공원과 신사까지 만들어놓았다. 그리고는 마치 성지순례하듯 이곳을 찾는다. 마리아나 제도 전체를 전쟁 성역화 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사이판과 티니안에 각 1곳씩, 그것도 민간에서 위령비를 세운 것이 고작이다.
사이판한인회(위원장 전병수)가 운영하는 한글학교(교장 방원석) 관계자는 "한인들이 끌려와 많은 희생을 당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지 관련된 전쟁유산이라든가 아픈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는 잘 모른다"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해 역사자료를 발굴하고 제대로 인식시킬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