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5)/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5)도성인가, 읍성인가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5)/제1부-성을 말하다 성곽을 거닐다](5)도성인가, 읍성인가
탐라국의 도읍 '도성' 역할… 명칭 제대로 부여해야
  • 입력 : 2014. 03.05(수) 00:00
  • 이윤형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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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제작된 지도인 탐라순력도 중 제주조점에는 제주성을 '제주도성(빨간 선 부분)'으로 표기하고 있다.

처음부터 제주성으로 불리다 18세기에 '제주도성'
전국 읍성과는 성격 다른 제주의 독특성 반영 흔적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등장하는 탐라는 중국과 한반도 및 일본 등과 활발한 해상교류를 펼친 해상왕국이었다. 제주가 국내외 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3세기 후반의 '주호'였다. 이어 서기 476년에는 '탐라국'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7세기에는 '탐라왕'과 '탐라국주'가 등장한다. 이 무렵 왕자에 의한 왕위상속 등이 이뤄진다. 한편에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활발한 대외교류를 펼친다.

하지만 탐라는 1105년(숙종 10년)에 탐라군으로 편입되고 만다. 독자적 지위를 누리던 탐라가 고려의 군현체제에 편입되면서 독립성을 잃게 된 것이다. 1223년(고종 10년)에는 탐라라는 이름마저 쓸 수 없게 된다. 이때부터 탐라는 '제주'로 이름이 바뀐다.

천년의 유산 제주성은 이러한 탐라국의 수부(首府)였다. 탐라시대의 성을 근간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의 이름도 '제주성' 내지는 '제주도성'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한 성격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제주읍성'으로 불리거나 '제주성지'라는 이름으로 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제주성은 조선시대 전국의 읍성과는 성격이 다른 '도성'이었다. 도성은 삼국시대 평양과 경주, 공주, 부여에 있었다. 고려시대 강화도성이나 개경, 조선시대 한양도성처럼 한 국가의 도읍을 두른 성이 도성이다. 그래서 더욱 견고하게 쌓았다. 강화도성은 해안에서부터 3중성의 요새를 구축했다. 한양도성은 길이만도 18km에 이를 정도로 치밀하고 견고한 방어막을 쳤다. 읍성과는 성격이나 위상이 다르다.

읍성을 얘기할 때 읍(邑)은 성으로 둘러싸인 고을을 형상화한 글자다. 한 고을을 지키기 위한 성을 대개 '읍성'이라고 부른다. 읍성이 전국적으로 정비된 것은 조선 세종대였다. 1418년 세종은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후 세종은 읍성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읍성만 해도 179개소에 이른다.

그렇다면 제주성은 도성인가, 읍성인가. 제주에 부임했던 목사나 제주인의 의식속에는 제주성은 '도성'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는 옛 지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와 이후에 제작된 『제주목도성지도』를 들 수 있다.

이형상 목사 시기 전국에는 각 읍성이 자리잡았다. 제주도의 경우도 1437년(세종 19년) 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의해 읍성·진성에 대한 체계적인 정비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뒤인 1702년 제작된 지도인 『탐라순력도』「제주조점」에는 '제주도성'(濟州都城)이라 표현 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읍성으로 표기해야 옳을 듯 하지만 이형상 목사는 굳이 제주도성으로 표기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1704)에서 찾을 수 있다. 이형상 목사는 "처음에 고을나·양을나·부을나 형제 3인이 그 땅을 나누어 살았던 곳을 도(徒)라고 한다. … 지금 주성 안에 세 부분으로 나뉘고 있는데 일도(一徒) 이도(二徒) 삼도(三徒)라고 이른다. 도(徒)의 글자는 의심컨대 도(都)의 오기로 보인다."고 밝히고 있다.

이형상 목사는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살았던 곳을 탐라국의 도읍, 도성으로 보아서 탐라순력도에 '제주도성'이라고 표기해 놓은 것이다.

또 하나 주목되는 문헌은 '제주목도성지도'이다. 이름에서부터 '도성'(都城)이라고 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제주목도성지도'는 1724년부터 1754년 사이에 제작됐다. 지도 윗부분에는 "주성은 본래 옛 탐라국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나누어 살던 곳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탐라국의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살던 곳이어서 '도성'으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눈여겨 볼 대목은 제주성은 읍성 정비 이전에 '제주성'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1408년(태종 8년) 태종실록에는 "제주에 큰 비가 내려 제주성에 물이 들어 관사와 민가가 표몰되고 화곡(禾穀)의 태반이 침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제주성'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이다. 이어 1411년(태종 11년) 태종실록에는 "제주성을 수축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또 나타난다.

그러다가 읍성 정비가 본격 이뤄지면서 1432년(세종 14년)에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주성은 '읍성'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이 시기는 세종대부터 시작된 전국의 읍성을 강화한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후대에 제작된 탐라순력도나 제주목도성지도에 '도성'으로 표기하고 있는 대목은 곱씹어볼만하다. 제주가 비록 봉건왕조에 편입됐지만 제주사회에서는 탐라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명칭을 제대로 부여하는 일은 탐라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진 제주성의 정체성 회복과도 연관된다. 그것이 곧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제주성의 생명력을 찾아주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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