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투하 당시 그대로 앙상한 뼈대만 남은 히로시마 원폭돔.이승철기자
1945년 8월6일 새벽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작은 섬 티니안에서는 '에놀라게이'로 불린 B-29폭격기가 날아올랐다. B-29 목적지는 일본 본토였다. 폭격기는 2530㎞를 날아 이날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 950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인 '리틀보이'(little boy)를 떨어뜨렸다. 핵폭탄은 히로시마 상공 600m 지점에서 섬광과 함께 작렬했다. 3일 뒤에는 '팻맨'(Fatman)이라 불린 핵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결국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도시 전체를 삼켜버렸다. 핵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원폭돔과 주변을 중심으로 반경 5㎞의 건물 90%가 파괴됐다. 그 중 히로시마 원폭돔은 뼈대만 남았다. 34만 명을 조금 웃돌았던 히로시마 인구 가운데 핵폭탄 투하로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에도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당시 한국인들도 2만여 명 가량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내에 자리한 자료관 전경.
원폭돔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말없이 상징하고 있다. 원폭돔 앞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침묵만이 흐른다.
원폭돔은 체코 출신의 건축가 이안 레츠르의 설계로 1915년 높이 25m, 5층 규모로 완성됐다. 처음엔 상업전시관으로 이용되다가 후에는 히로시마 상품진열관으로 이름이 바뀐다. 한때 히로시마의 자랑거리였고, 일본 제국주의 선전장이었던 원폭돔은 핵폭탄 투하 이후 시간이 멈춰버렸다. 앙상한 철골만 남은 건물은 당시의 충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원폭돔이 위치한 일대는 194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건설법에 따라 평화기념공원으로 조성됐다. 주요 시설로는 원폭돔을 비롯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원폭사망자추도 평화기념탑, 히로시마 국제회의장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평화기념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원폭돔을 비롯한 당시 원폭피해 시설들을 철거할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제기됐다. 결국 히로시마 시의회에서 1966년 원폭돔과 그 주변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원폭돔이라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원폭돔에서 모토야마 다리를 건너면 평화기념공원이 나타난다. 당시 희생된 한인들을 위무하기 위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도 평화기념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핵폭탄이 투하된 원폭돔과 그 주변을 보존하기 위해 히로시마 시의회는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나섰고 1996년 등재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제국주의 전쟁의 상징인 부끄러운 장소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함으로써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원폭돔을 자료관 내에 재현한 모습.
히로시마 원폭돔은 세계유산 등재 당시부터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원폭피해를 가져온 원인보다 원폭 참상 자체에 중점을 두면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자 가해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내에 자리한 자료관 등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히로시마평화기념자료관은 1955년 개관했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 핵폭탄 사망자의 희생을 기리고 추도하기 위해서다. 영원한 평화를 기원하는 한편 핵폭탄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려 그 체험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의도아래 조성됐다. 기념관 본관은 2006년 7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전시는 핵폭탄 개발과 히로시마에 투하되기까지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물은 충격적이다. 희생자의 유품 및 피폭자료,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등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있다.
리플릿 등에는 미국의 핵폭탄 투하는 전쟁 종결과 소련의 영향력 확대 저지,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핵폭탄 개발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히로시마에 투하가 결정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히로시마 원폭피해의 원인, 일본이 아시아 각국을 침략한 전쟁의 배경 등은 무시되면서 막대한 피해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원폭 사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
원자폭탄으로 인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강조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는 어디까지나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전쟁에 대한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유산들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한인 강제동원과 이로 인한 피해 등에는 눈을 감고 있다. 군함도와 지란특공평화회관 등이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노골화하고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등 역사도발을 벌이는 이면에는 이같은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