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 합수(合水) 머리에서 길을 본다

[하루를 시작하며] 합수(合水) 머리에서 길을 본다
  • 입력 : 2015. 08.12(수) 00:00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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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도 복더위가 맹위를 부린다. 아스팔트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까지 온몸을 파고들어 불쾌지수를 고조시킨다.

허나 생명력이 있는 한, 움직이며 사는 게 우리네 삶의 전형이 아닌가.

세상사엔 숱한 길이 있다하여 만물유도(萬物有道)라 말한다. 하늘에는 천도, 사람에겐 인도, 스승에겐 사도, 예술인에겐 예도 등이 있는가 하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민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것은 더 크고 넓고 깊은 대양으로 가는 자연의 길이다. 그 이상의 길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위용을 자랑하던 천지연 폭포수의 삶도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억겁의 기나긴 여정을 달려 왔는가.

마치 수도자의 길고도 먼 수행 길을 걸어온 것처럼, 오직 대양만을 향하여 높은 자리도 마다하고, 앞지르기도 거부하고, 그 누구와도 아첨도 하지 않고 오로지 역행 없이 낮은 곳만을 향해 순응하며 굽이굽이 흘러온 겸손과 순수함 그 자체의 모습이다.

민물은 낮은 곳인 대양을 찾아 흐르는 게 본성이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막히면 돌아서 가고, 급경사일 땐 곤두박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갈리고 부서지면 다시 모여질 때까지 기다리고, 독극물과 이물질에 오염되면 사경을 헤매면서도 포용하고 흐르면서 정화시켜 나간다.

인생의 끝은 죽음이 아니듯이 민물의 끝은 대양이다. 대양에 이르면 줄기차게 흐르던 흐름도 멈춘다. 대기권을 넘나들며 대양으로 사는 게 자연의 섭리이거늘, 어찌 거역할 수 있을까. 옹달샘에서 시작된 민물이 개울과 하천을 거쳐 물기둥 같은 폭포수를 만들며 살아오다가 생수괴 하구에 이르면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는지, 아니면 유한의 시공을 벗어나 무한을 넘나드는 새로운 대양의 삶을 열려 함인지, 그 풍광은 자못 인생에 대한 삶의 사색을 유혹한다. 생수괴에서 민물과 바닷물의 합수하는 장면은 자연의 향연치고는 너무 조용하고, 엄연(儼然)하고, 경건(敬虔)하다.

민물과 합수된 대양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큰 홍수가 와도 넘쳐나지 않는다.

생과 사, 선과 악 등 세상만사를 모두 포용하면서도 그 흐름은 유유(悠悠)할 뿐이다. 대양은 무한한 곳이며 영원을 지향한다. 자연의 섭리에 의해 자전과 공전으로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네 삶과 함께 한다.

이제, 민물로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민물의 삶과 새로운 삶을 여는 대양을 떠올리며 지기지우와 암울했던 소싯적 추억담을 주고받으며 너스레를 떨다 보니 대양의 삶도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상념에 젖는다.

영원한 폭포수라고 믿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대양으로 바꿔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작과 끝, 끝과 시작은 다름이 아니고 하나의 선상에서 공존하는 위대한 공동체임을 깨닫는다.

대양은 어떠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며 본디 성질도 변하지 않는다. 오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면서 대양의 본성인 정화력, 인내력, 창조력을 발휘하여 천륜을 지켜가며 모두가 윈윈하는 삶을 열어간다.

민물과 폭포수는 흐르다 멈추면 썩지만 대양은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 게 자연의 이치이고 대양의 본모습이다.

민물과 바닷물로서의 끝과 시작은 우리네 삶의 가치이고 희망이다.

결코 민물과 바닷물은 다르지 않고 더 높고 깊고 넓은 대양을 향해 계속 돌고 도는 윤회(輪廻)의 삶이다. 그 속에 우리가 나직하게 살아 있음을 떠올려 본다. <부희식 전 사대부고 교장·제주수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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